[재벌 규제완화 논란… 이렇게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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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기업 규제완화 논의가 정치 쟁점화한 데 대한 경제계의 반발이 거세다.

재계에서 출자총액한도 제한 등 기업지배구조와 직접 관련되는 규제를 풀라고 목소리를 높인 이후 한나라당이 재계 입장 수용을 주장하면서 꼬여버린 것.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재계만 가만히 있었어도 문제가 좀더 쉽게 풀릴 수 있었다" 고 아쉬워하고 있다.

◇ 정치 쟁점으로 떠오른 규제완화〓기업규제 완화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지난 3일. 민주당 강운태 제2정책조정위원장이 무역업계와의 간담회에서 "종합상사와 건설.해운.항공운송 등 4개 업종에 대해선 부채비율 2백% 적용 기준을 탄력적으로 운용키로 했다" 고 말하면서 시작됐다.

이튿날 아침 진념 경제부총리는 고려대 경제인회 초청 강연에서 "외환위기 이후 새로 생긴 기업관련 규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7일 민주당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개혁 피로감' 을 이유로 개혁정비론이 나오고 재계의 규제완화 목소리가 높아지자 8일 청와대가 '개혁 지속' 을 거듭 강조했다. 다음날 청와대 이기호 경제수석과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출자총액 제한이나 30대 그룹 지정 등 소위 대(對)재벌정책은 변함없다는 발언을 계속했다.

15일 민주당과 정부가 당정협의를 통해 출자총액의 기본틀을 유지하기로 합의한 이후에는 보다 원색적인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 강운태 위원장은 "현재 기업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갖춰나가는 과정으로 지금 출자총액한도 제한을 풀면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 라며 "한나라당이 무조건 풀라고 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주장" 이라고 말했다.

◇ 상황이 바뀌었다〓정부가 출자총액 한도를 제한하고 30대 그룹을 지정해 채무보증 금지 등 제한을 가하는 것은 바뀐 경제여건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예컨대 출자총액 한도는 그룹 계열사들이 서로 지급보증을 못서게 됨에 따라 계열사들이 서로 출자하는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홍익대 박원암 교수는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결합재무제표 도입, 집단소송제.집중투표제 도입 추진, 사외이사 요건 강화 등 기업 재무구조를 투명하고 건전하게 만들기 위한 각종 제도를 만들어 왔다" 며 "이같은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면 정부가 규제하지 않아도 기업의 가치가 시장에서 평가될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룹 계열사의 규모가 천차만별인데 한가지 기준을 적용하는 것도 문제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그룹사의 규모를 한가지 잣대로 재서 획일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된다" 고 잘라 말할 정도다. 그는 특히 "출자총액 한도도 소유집중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투자행위로 인식해야 한다" 고 말했다.

◇ 경제논리로 풀어야〓과거 시장을 무시한 채 정치논리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려던 시도는 성공한 예가 드물다.

유승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은 "정부의 정책이 재벌 해체로 나타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투명경영과 경쟁력 향상이지 재벌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고 말하고 "정부의 핵심역량 강화 정책이 제대로 됐다면 외환위기 이후 단행된 빅딜도 제대로 됐을 것" 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신광식 연구위원은 "재벌정책을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로 가져가서는 안된다" 고 전제, "출자총액 한도를 완화하고 30대 그룹 지정을 폐지하자는 재계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고 밝혔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투명성 등을 시장에서 평가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된 만큼 정부가 직접 규제하기보다 경쟁을 통한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공정위가 1987년부터 출자총액 제한제를 유지해왔지만 결국 외환위기의 원인이 된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지 못했고, 많은 예외를 인정해 제도의 본래 실효성을 많이 떨어뜨렸다" 고 지적했다.

송상훈.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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