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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산책] 20. 영웅 만들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북한에서는 다양한 '사회주의 영웅' 이 심심치 않게 태어나고 있다. '영웅' 은 당의 필요나 실제적인 인민의 요구에 따라 탄생한다.

정춘실도 시대적 요구에 따라 부각된 '숨은 영웅' 으로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현지지도에서 발굴됐다.

자강도의 오지인 전천군 상점판매원 신분에서 일약 1977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여성 정춘실. 그녀가 적극 활용했다는 가정수첩은 북한 상점망 '주문제 상품공급' 의 핵심이 됐다.

그녀가 세대별로 작성한 '우리 가정수첩' 에는 가족들의 옷 호수와 신발 문수부터 언제 결혼식이나 환갑이 있다는 것, 공급된 상품은 무엇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것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시장경제식으로 표현한다면 '찾아가는 마케팅' 방식이라고나 할까.

'우리 가정수첩' 은 수요를 예측해 미리 계획적으로 대처하려는 상품 공급방법의 전형이다. 더 나아가 이웃들의 세간살이를 자기집 세간살이처럼 돌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영웅따라 배우기' 운동이 필요한 점은 그만큼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늘 발생할 수 있으며, 관료주의적 나태함을 타파해야 한다는 역설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정춘실 같은 성실한 일꾼이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관료주의 병폐의 한 예를 들어보자. 사회주의 상업의 핵심은 '공급' 이다. 가령 어느 구역에 신발 5백켤레가 필요하다고 치자.

올 봄에 닳은 신발이 3백켤레, 가을에 2백켤레가 예상된다고 하면 봄.가을에 필요한 양이 '제때' 공급돼야 한다.

봄에 1백켤레, 가을에 4백켤레가 공급된다면 똑같은 5백켤레이지만 '실패작' 이다. 설령 5백켤레가 시기를 맞춰 적기에 공급된다고 해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4백70여명은 평범한 발크기인데 30여명이 왕발이라고 치자. 왕발이 작은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

그런데 공급을 수행하는 일꾼들이 5백켤레 공급을 1백% 제때 완료했다고 당에 보고한다면 당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왕발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이 되고 만다. 때문에 관료주의적 경직성을 억제하려는 고심에 찬 '신경쓰임' 이 당국자들에게는 요구된다.

정춘실운동은 이론과 현실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동시에 '숨은 일꾼' 의 헌신적인 노력만이 '원초적' 문제를 푸는 유력한 방식이라는 점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주의 체제라는 데서는 필요한 물건을 제때에 공급함에 있어 한치의 오차도 허용해선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사에 오차가 없겠는가. 오차가 커지면 동맥경화증이 심해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만큼 북한의 생필품 공급에서의 모순은 늘 새로운 영웅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은 물자 부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급체계의 경직성에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계획경제가 실생활에 투영되는 현실은 늘 어렵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강현 <우리민속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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