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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up] 대북사업 고심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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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현정은(55·얼굴) 현대그룹 회장은 재계에서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는 승부사로 통한다. 말을 아끼는 현 회장이지만 올 들어 이따금 사용하는 고사성어가 있다. 바로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간다’는 뜻의 ‘승풍파랑(乘風破浪)’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 장수였던 종각(宗慤)이 위기 때마다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며 난관을 헤쳐 나가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동안 현 회장은 “금강산과 개성 관광 중단은 고통스럽지만 곧 재개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라”고 직원들에 당부해 왔다. 18일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의 갑작스러운 퇴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23일 장경작 전 롯데그룹 호텔 부문 총괄사장을 현대아산의 후임 사장에 내정했다. 대북사업과 관련해 첫 ‘행동’에 들어간 현 회장의 다음 행보에 관심이 더욱 쏠리는 이유다.

지난 7년간 현 회장은 고비마다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 왔다. 2003년 시삼촌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측과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도 말을 무척 아꼈다. 그러면서 ‘국민주 운동’을 벌여 단번에 우호세력을 결집하며 현대그룹 경영권을 지켜 냈다. 2005년 대북사업을 주도했던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퇴출시킬 때도 그랬다. 말보다는 바로 행동으로 김 부회장을 그룹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지난해도 마찬가지다.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1년 넘게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을 때도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 카드다. 다섯 차례나 북한 체류 일정을 연장하며 북측 실무진을 압박한 게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전히 대북 문제가 꼬여 있어 현대아산이 고전 중이지만 다른 계열사들은 회복세를 타고 있다. 그룹 곳곳에서 현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량 수송권을 둘러싸고 국내 해운업계와 대형 화주 간 갈등이 수개월간 이어지고 있을 때다.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은 ‘구시렁거리는’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잠수함’처럼 물밑에서 움직였다. 지난해 12월 현대상선은 포스코와 20년간 원료탄과 철광석을 실어 나른다는 장기운송계약(CVC)을 맺었다. 8700억원짜리 계약으로 경쟁 선사들로부터 시샘과 부러움을 샀다.

현대증권이 100% 출자해 지난해 여름 출범한 현대자산운용의 성장도 눈부시다. 현 회장은 7월 본점에서 열린 출범식 현장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시간에 지점을 방문해 펀드에 가입하는 ‘행동’을 보여 줬다. 현대자산운용의 수탁액은 출범 반년 만인 올 초 3조원을 돌파했다. 현대자산운용이 운용 중인 ‘현대그룹플러스펀드’는 지난 6개월간 기간 수익률이 4.5%로 그룹주 펀드(최소 10억원 이상) 가운데 수익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아산이 실무진 4명만을 금강산에 보내겠다고 통일부에 통보한 23일, 현대상선과 현대택배가 물류업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중량화물 육상운송업체인 ㈜동방과 손잡고 합작법인 ‘현대동방아틀라스’를 설립한 것. 발전기나 기계 설비처럼 무게가 300t이 넘는 중량화물 운송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357억 달러에 달하는 플랜트 시장을 노린 것이다.

현 회장은 ‘승풍파랑’의 기세로 2012년까지 매출 34조원, 자산 규모 49조원, 재계 13위의 인프라·물류·금융그룹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상선과 증권이 ‘바람’을 타면서 대북사업의 ‘물결’을 헤쳐 나갈 기세다. 이달 초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번듯한 사옥도 마련하며 힘을 모으고 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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