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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위해 똘똘 뭉친 40대 직장맘들

중앙일보

입력

지난 13일 오후, 방이동의 한 레스토랑에 6명의 엄마와 아이들이 모였다. 한 달에 한번 있는 ‘헤라의 여신’ 모임이다. 직장이나 집안일로 바쁜 엄마 몇몇은 오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이 모임은 2년 전, 풍납초등학교(송파구 풍납동 소재) 3학년 4반 학부모 몇몇이 만든 엄마들 모임이다. 모임의 주축은 직장 생활을 하는 40대 이상의 나이많은 초등생 엄마들. 아이들을 통해 만났지만 이들은 교육 정보는 물론 라이프 스타일까지도 공유하는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됐다.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엄마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늘어나고 있다.


‘헤라의 여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은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 덕에 지어졌다. “아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사랑을 베풀어주신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덕분에 학교를 자주 찾지 못하는 직장인 엄마들도 마음 놓고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었죠. 엄마들 모두가 선생님의 팬이었을 정도였어요. 그분은 ‘박혜라’ 선생님입니다.” 신정훈(12)군 엄마 정민희(46)씨의 설명이다. 선생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그리스 신화의 여신 ‘헤라’를 차용해 ‘박혜라 선생님을 지지하는 여신(엄마)들’이라는 뜻을 담아 지었다.

“당시 아이가 학급회장이 됐다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는 이석기(현재 12)군의 엄마 김유경(44)씨. 그는 자신을 두고 “임원 엄마들이 모임을 꾸려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정보력 제로의 엄마였다”고 말했다. 부회장 박하영양의 엄마 유지희(43)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급 운영에 참여하고 있던 다른 반 엄마들이 ‘4반은 큰일났다’며 걱정할 정도였다. 1학기가 중반을 넘길 무렵, 유씨가 김씨에게 연락한 것을 계기로 엄마 4명이 처음 모이게 됐다. 만나고 보니 모두 일하는 엄마인 데다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에 아이를 입학시킨 ‘나이 많은 엄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후 체육대회를 계기로 임원 엄마들뿐 아니라 몇몇 엄마들이 안면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12명으로 인원이 늘어 3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게” 공통된 숙제

‘나이 차’와 함께 ‘직장맘’이라는 핸디캡은 ‘젊은 엄마’‘전업 주부 엄마’와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정민희씨는 “예전엔 서른이 넘으면 ‘노처녀’에다 ‘노산’이라고 할 정도로 결혼과 출산 시기가 빨랐다”며 “정훈이를 어렵게 낳아 학교에 보내놓고는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10살 넘게 차이나는 젊은 엄마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숙제였다”고 말했다. 라이프 스타일도, 관심사도 차이가 났기 때문. 하지만 ‘헤라의 여신’은 비슷한 상황의 엄마들의 모임이라 공감할 수 있는 화제거리가 많았다.

나이 많은 엄마들의 공통된 관심사 중 하나는 ‘동안 관리’다. 학부모 면담을 앞두고 아들 정훈이가 정씨에게 던진 한마디. “엄마,다른 애들 엄마는 ‘누나’나 ‘이모’ 같아요. 대충 하고 오지 말고 차려 입고 오세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씨는 “패션에 무관심한 편이지만 아이 덕분에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 정보도 귀담아 듣게 된다”며 나이 많은 엄마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드는 김유경씨는 최근 피부과 시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금씩 늘어가는 눈가 주름과 목주름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부과에 가봤더니 나이 많은 엄마들을 위한 ‘신학기 탄력 패키지’가 있더군요. 학교 갈 일도 늘어나고 엄마들 모임도 많은 때라 다른 엄마들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 중이에요.”

전문직 직장맘 덕에 교육·의료 정보도 공유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유지희씨는 수시로 엄마들의 전화 문의를 받는다. “신종플루 접종을 꼭 받아야 하나” “갑자기 아이가 토하는데 어떻게 하죠” 등. 그 때마다 유씨가 일러주는 조언은 엄마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홍제혁군의 엄마 홍명조씨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 정보 전문가인 셈. 유지희씨는 딸 하영이를 아예 홍씨의 학원에 맡겼다며 “수학이 좀 부족해서 학원에 보내야 했는데 언니네 학원이면 아무 걱정 없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은 엄마들인 만큼 회사 대표나 임원도 있고 전문직에 10년 이상 종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조언을 두루 들을 수 있는 게 좋은 점이다.

학년이 바뀌어 모두 반은 다르지만 3년 넘게 만남을 이어오고 있으니, 아이들끼리도 형제 못지 않은 사이가 됐다.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던 하영이도, 형제가 없어 외롭지 않을까 염려되던 정훈이도 ‘헤라의 여신’ 모임에서는 함께 어울리며 뛰어노는 천방지축 개구쟁이가 된다.

수다 모임 넘어 급식비 지원, 해외 봉사도 계획

헤라의 여신은 좀 더 의미 있는 모임으로 발전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모임 초기에 시작한 저소득층 아동 급식비 지원은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아동 복지에 관심을 갖고 있던 홍명조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다. 1년에 60만원 정도면 한 명의 아이가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여럿이 모으면 부담스럽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모임에서는 쉽게 진행 되지 않았다. 그런데 ‘헤라의 여신’에서 제안했더니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홍씨는 "여러 엄마들 모임이 있는데 너무 ‘내 아이’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며 "반면 나이가 좀 있는 엄마들은 다른 아이들까지 내 아이처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덕분에 혼자 하기 힘든 좋은 일을 실천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웃었다. ‘헤라의 여신’은 사회 봉사 활동에도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올해안으로 자녀들과 함께 해외 봉사 활동도 떠날 계획이다.

[사진설명]지난 13일, ‘헤라의 여신’ 회원들이 정기모임 후 학교에 들렀다. 헤라의 여신은 40대 직장인 엄마가 주축인 풍납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이다.

< 하현정 기자 happyha@joongang.co.kr / 사진=김진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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