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교과서, 일본의 대답을 주시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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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재수정 요구안이 어제 일본 정부에 전달됐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 편찬한 후소샤(扶桑社)간(刊) 교과서를 비롯해 8종의 교과서를 정밀 검토한 결과를 35개항의 재수정 요구로 정리해 일본측에 전달함으로써 교과서 파동은 일단 일본 쪽으로 공이 넘어갔다.

남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성의를 갖고 우리의 요구에 응하느냐는 것이다. 교과서 문제로 양국간 선린우호 관계가 훼절(毁折)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일본 정부의 대응을 주시코자 한다.

정부의 재수정 요구안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은 일본 사회 일각의 왜곡된 역사인식이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후소샤간 교과서는 고대사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사를 미화하고 치부를 은폐하는 왜곡된 역사기술로 일관하고 있다.

한.일 학계의 50년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설을 사실인양 버젓이 기술하고 있고, 학계의 통설을 무시한 채 『일본서기』의 기록만을 근거로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일방적 서술도 서슴지 않고 있다.

또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뻗은 팔뚝' 에 비유함으로써 일본 방위 차원에서 한반도 침략.지배의 불가피성을 암시하는 해괴한 논법도 불사하고 있다. 강제합병에 대해 "한국 국내에서도 병합을 수용하자는 일부 목소리가 있었다" 고 기술, 극소수 친일파의 목소리를 고의로 부각시켰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교과서가 군대위안부 문제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켜 일본군 잔혹행위의 가장 중요한 실체를 은폐하고 있다. 1993년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 스스로 군대위안부와 관련한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해놓고도 이를 뺀 것은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95년 '무라야마(村山)담화' 와 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에서 표명된 역사인식과 '근린제국 조항' 에 근거해 적법한 검정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으로 해를 가리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일본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황국(皇國)사관' 의 병균을 심어줌으로써 인종적 우월주의와 국수주의를 부추기려는 극우세력의 책동에 일본 정부가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는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한국측 주장을 성실히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 말하면서도 재수정은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역사란 왜곡과 미화로 분식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교육에 반영하느냐가 역사교과서의 기본정신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고치는 것 자체가 일본의 지적 풍토를 고양하면서 일본 스스로 아시아의 지도국임을 증명하는 길이다. 일본 정부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 우리의 재수정 요구에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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