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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北변화 외치기 전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아들이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붙들린 사건을 보는 많은 한국인들은 그것 참 고소하다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남의 불행에 기분이 좋은 감정)와 함께 동족으로 남부끄럽다는 자학(自虐)을 가장한 가학성(加虐性)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다.

북한 인민은 도탄에 빠졌는데 거액의 외화를 갖고, 가족까지 동반한 외유를 즐기는 김정남의 모습은 확실히 엽기적이다. 저게 바로 북한의 수준이다, 어찌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왕따 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비난이 쏟아져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정남의 탈선행위는 많은 독재자의 자식들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유고연방의 전 독재자 밀로셰비치의 아들 마르코의 사치와 방종은 악명 높았다. 그는 담배 밀수와 석유 이권으로 돈을 벌고, 나이트클럽과 유고판 디즈니랜드를 운영했다. 그는 캘빈 클라인 팬티를 자랑하려고 베르사체 진을 배꼽 아래까지 내리고 다녔다. 그는 지금 러시아에 도피 중이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의 여섯 자녀들은 많은 이권에 개입해 수십억달러를 치부했다. 그중에서도 막내 토미는 자동차.석유.목재.비료.항공기.부동산.건설.클로브(香草) 등 방대한 분야의 사업으로 혼자서 6억달러 이상 축재를 했다. 그는 토지사기 혐의로 18개월의 유죄를 선고받고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 아버지에게 불효를 하는가 했더니 84년 소련으로 돌아갔다가 2년 뒤 미국으로 재망명하는 진기록으로 세상을 웃겼다. 그녀가 러시아와 미국 어디서도 정서적으로 정착할 수 없었던 것은 김정남의 경우와 같이 크렘린 울타리 안 결손가정에서 자란 환경의 결과로 보인다.

스탈린의 죄악상을 폭로한 또 다른 소련 지도자 흐루시초프의 아들도 지금은 역사학교수로 미국에 정착해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쿠바 독재자 카스트로의 딸 알리나도 93년 미국으로 망명해 아버지의 실정(失政)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자였건 민주적인 지도자였건 대통령이나 총리였던 선대(先代)의 후광 아래 정치적으로 성공한 정치명문가의 2세들도 적지 않다. 수카르노 전대통령의 딸 메가와티(인도네시아),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딸 아로요(필리핀), 부토 전 대통령의 딸 베나지르(파키스탄), 네루 전 총리의 딸 인디라 간디(인도)가 그들이다.

그들의 으뜸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겠다. 권력자의 자식들이 모두 조지 부시나 메가와티나 인디라 간디같이 성공할 수는 없다. 그들이 모두 김정남과 마르코와 토미 같은 말썽꾸러기도 아니다.

김정남 사건이 불량국가 북한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단정으로 우월감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물어보자.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소통령" 소리를 들으면서 인사와 이권을 농단(壟斷)해 아버지 대통령에게 국민 앞에 사과하는 치욕을 안기고, 급기야 철창 신세를 진 남한 대통령의 아들과 김정남은 많이 다른가. 재벌 아버지한테서 세습받은 부(富)를 가지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 기업을 날리고 국가경제에 해악을 끼친 일부 졸부들의 아들들과 김정남은 많이 다른가.

조니워커 블루라는 고급양주를 마시고 값비싼 일제 골프채를 자랑하고 서민에게는 꿈 같은 1천만원짜리 내기를 입에 올리면서 필드의 신선놀음을 즐긴 여권3당 수뇌부와 김정남은, 지도층이 경제난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신의 쾌락을 좇았다는 점에서 어디가 다른가.

주말 아시아나 골프장에서 드러난 그들의 민심불감증과 가치관 혼란이 한국 사회에 퍼뜨리는 일종의 도덕적 허무주의 풍조는 김정남 사건을 가지고 북한을 실컷 야유하고 싶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다. 우리에게는 김정남 사건을 들어 북한의 변화를 촉구하기 전에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을 철들게 하는 방도를 찾는 게 급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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