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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신작 '순간의 꽃' 찰나의 생각 옮겨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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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나에게는 시무(詩巫)가 있어 여느 때는 멍청해 있다가 번개 쳐 무당 기운을 받으면 느닷없이 작두날 딛고 모진 춤을 추어야 하는지 모른다. … 이런 무당 기운 말고 올해부터 날마다 한 편 혹은 두 편의 작은 시편들을 쓰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내 수행이라면 수행이고 싶은 것이다. "

고은 시인이 짧은 시 1백85편을 묶은 신작 시집 『순간의 꽃』(문학동네.5천5백원)을 펴냈다. 1958년 '현대문학' 을 통해 등단한 고씨는 지금까지 시.소설.평론.평전 등에 걸쳐 1백20여권의 책을 냈다.

하룻밤에도 신들린 듯 수편의 시를 써내기도 하는 '시의 무당' 고씨에게 시신(詩神)이 저절로 지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 실린 짧은 시편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시신이 들리게 하기 위한 참선 같은 고요한 수행 중 찰나에 잡힌 생각들을 시적 치장 없이 그대로 쓴 것이 이 시편들이기 때문이다.

"쉼표여/마침표여/내 어설픈 45년/감사합니다//더이상 그대들을 욕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 "만물은 노래하고 말한다/새는 새소리로 노래하고/바위는 침묵으로 말한다/나는 무엇으로 노래하고 무엇으로 말하는가//나의 가갸거겨고교는 무슨 잠꼬대인가" .

청정한 수행으로 살아 있는 부처로 칭송받았던 성철스님은 "한평생 남녀를 속였으니/그 죄업은 하늘에 넘치네" 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고씨 역시 '더이상 그대를 욕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나의 가갸거겨고교는 무슨 잠꼬대인가' 라며 자신의 시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티끌 한 점 없이 순진무구한 시세계를 향한 도상에서의 구도 자세 그대로가 이 짧은 시편들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해서 세파와 지식에 찌들고 물들지 않은, 사물과 맨몸으로 만나는 직관 그 자체를 아래와 같이 활자화하게 된다.

"가재야 너는 왜 그리도 복잡하니□//더듬이에다/턱다리에다/털발에다/가슴다리/배다리에다/또 무엇에다" . "봄바람에/이 골짝/저 골짝/난리났네/제정신 못 차리겠네/아유 꽃년 꽃놈들!" 독자를 홀리기 위한 시적 치장을 하면 이 짧은 시편들은 그럴듯한 시편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잃어버리게 될 순진무구의 세계를 고씨의 짧은 시편들은 생짜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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