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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가 왜 ‘언어의 마술사’인지 알겠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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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이리스’의 백산 등 액션·호걸 연기를 주로 해온 김영철은 주말극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어수룩하되 정이 깊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SBS 제공]

여자들의 속사포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 남자, 제주 돌하르방처럼 웃는다. 야멸차게 할 말 다하는 아내(김해숙)와 팔순의 억척 어머니(김용림) 사이에 낀 품세가 든든하고도 애틋하다. 김수현 작가의 SBS 주말극 ‘인생은 아름다워’(토·일 밤 10시)에서 3대 가족의 허허실실 가장 양병태 역으로 돌아온 김영철(57).

‘아이리스’의 냉혈한 ‘백산’은 간 데 없이 “어수룩한 제 속을 김수현 선생이 꿰뚫어본 것 같다”고 말하는 그를 전화로 만났다. 제주도 송악산 자락 오픈세트에서 한창 촬영 중이라고 했다. 20일 첫 방송된 ‘인생은 아름다워’는 1, 2회 방송 시청률 14.7%(AGB닐슨미디어리서치)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아이리스’ 끝나고 쉬는 동안 정을영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선생님이 새 작품의 아버지 역할로 나를 꼭 쓰고 싶다고 했단다.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을 다 즐겨봐서, 꼭 한번 일해보고 싶었다. 극본을 받아보니 ‘아, 이건 그냥 나를 보여주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 동안 무겁고 센 역할을 자꾸 해서 ‘이러다 보여줄 게 없어지면 오버하겠다’는 걱정까지 들었는데, 잘 맞아떨어졌다. 정 감독과는 TBC 동료 출신인데, 제대로 작품 같이하는 건 처음이다.”

-‘아이리스’의 백산도 그렇고, 강하고 중후한 역할을 많이 했다.

“그런 역할이 주목 받아서 그렇지 실제 모습은 어수룩하고 속되게 말해 ‘쌈마이’ 끼가 좀 있다. 그걸 김 선생님이 꿰뚫어본 게 아닌가 싶다. 양병태는 한 템포 늦으면서도 집안의 중심을 잡는, 다정다감하고 관대한 아버지다. 아이들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모습도 실제 나 같다. 그래서 촬영장 가는 마음도 편하다. ‘아이리스’ 땐 집에서부터 수트 입고 나섰는데, 요즘은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끌고 간다. 김 선생님이 배우에 대한 장·단점을 잘 알고, 극에 녹아 들게 써주시니까 점점 내 모습이 나올 것 같다.”

-바람 핀 아버지에 동성애 아들을 둔 역할이다. (※‘드라마 리뷰’ 참조)

“그걸 감싸 안는 게 가족 아니겠나. 요즘 드라마가 ‘막장’ 소리 듣는 게 민감한 소재를 툭툭 건드리고 말아서 그런 것 같다. 대본을 보면, 김 선생님이 참 고민 많이 했구나 생각이 든다. 동성애란 게 당사자 심정은 어떻겠나. 게다가 태섭(송창의)이가 전처 소생이라서 아내가 마음의 빚이 있다. 그걸 아버지 입장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시청자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희망과 따뜻한 가족애를 전하는 드라마가 필요하지 않겠나.”

-김수현 극본은 대사가 많기로 유명한데.

“대본 리딩(reading)을 직접 지도하시는데, 까다롭다는 얘길 숱하게 들어선지, 오히려 편하고 귀여운 면까지 느껴지더라. 젊은 친구들이야 한마디 들으면 주눅 들지 몰라도, 선생님이 안 계시면 룰이 안 잡힐 것 같다. 대사는 기가 막힌다. ‘-아’ ‘-어’ 한마디가 귀하다. 웃는 것도 ‘하하’ 다르고 ‘허허’ 다르다. 쓰인 대로 딱 맞게 하는 게 처음엔 힘들더니, 할수록 착착 입에 감긴다. 이래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구나 싶더라.”

-제주도 촬영이 쉽지 않다고 들었다.

“우리끼린 감옥 생활이라고 말한다. 비바람 불면 오픈 세트 촬영도 여의치가 않다. 그리고 정을영 감독이 굉장히 꼼꼼하게 찍는다. 밥상 숟가락 위치까지 챙기는데, 아무리 친구라도 징글징글하다. ‘아이리스2’ 섭외도 받았지만, 올해는 이 역할만 하면서 보내고 싶다. 연습장 갈 때마다 오늘은 내게서 뭘 뽑아낼 건가 생각한다.”

강혜란 기자


‘인생은 아름다워’는 …
3대 가족 일상사 보여주며 금기 소재도 처음 건드려

극중 동성애 커플로 등장하는 송창의(왼쪽)·이상우. [SBS 제공]

갈등하는 인간 군상을 극한까지 다뤄 한국 드라마의 지평을 넓혀 온 김수현(67) 작가. 대가족 3대의 아옹다옹 가족관계를 폭넓게 건드리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눈에 띄는 소재는 동성애다. 첫 회에서 태섭(송창의)-경수(이상우) 남남 커플을 암시하더니, 2회에선 경수의 대사를 빌어 노골적으로 명시했다. “너는 나보다 솔직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우물쭈물하다 결국 결혼까지 하구 애까지 낳아 놓구 들키지 말구.”

보수적인 안방 극장에서 제법 파격적 도전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동성애는 다양한 가족 갈등의 하나로 그려진다. 작가의 시선도 성적 정체성에 대한 개인의 고민보다는 가족마저 공유할 수 없는 근원적 고통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대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장가가지 않는 태섭을 가리켜 “손바닥에 땀나는 병이 있냐”고 헛짚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태섭이 양병태(김영철)의 전처 소생이란 점에서 재혼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부채감과 소통의 어려움을 드러내게 된다. 김 작가는 트위터에서 “동성애 거북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도록 해볼 생각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리 편치 않은 소잽니다. 편견 없이 다루는 것으로 노력할 참입니다”라고 밝혔다.

드라마의 주축은 제주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초로의 재혼 부부다. 양병태와 김민재(김해숙)에겐 초혼에서 각각 얻은 아들 태섭과 딸 지혜(우희진)가 있고, 그 아래로 호섭(이상윤)과 초롱(남규리)을 뒀다. 밖으로만 나돌며 여섯 부인을 거느렸던 노부(최정훈)가 팔순이 넘어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하면서 평온하던 가족은 풍파에 싸인다. 1, 2회의 마지막 장면을 각각 병걸(윤다훈)과 민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으로 처리해, ‘조심조심 해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코믹하게 터치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장편 주말극이 제작되는 것도 처음이다. 김용림·김상중 등 이른바 ‘김수현 사단’으로 불리는 출연진에 김영철·우희진·남규리 등 새 얼굴이 합류했다. ‘엄마가 뿔났다’의 장미희도 조만간 김상중과 티격태격 하는 연정의 상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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