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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갓집 대문 두드리기 10년, 마침내 한옥이 말을 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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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동춘 작가가 2009년 6월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에서 찍은 초여름 한옥. 기둥과 기둥 사이 두 폭 그림처럼 집 안으로 들어온 백일홍과 대나무가 싱그럽다. [이동춘씨 제공]

서울 북촌 한옥 마을에 구경꾼이 몰린다. 사라져가는 한옥을 되살려놓은 골목마다 카메라를 맨 손님들이 기웃거린다. 아파트와 양옥에 밀려 천더기가 됐던 한옥의 화려한 귀환이라고 해야 하나. 넉넉한 대청마루에 나지막한 댓돌이 정겨운 우리 옛집이건만 사람들은 미끈한 모델 보듯 허우대 훑기에 바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문설주에 기대도 보고, 처마기슭 하늘로 눈길도 주어봐야 느낄 수 있는 한옥의 맛을 놓치는 이가 많다.

사진가 이동춘(49)씨는 한옥의 껍데기 말고 속살 제대로 보겠다고 아예 보따리를 쌌다. 본디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소문난 한옥을 방방곡곡 수소문해 밥솥에 청소도구 챙겨 한걸음에 달려갔다. 해남·강진·안동·경주·보은·강릉…. 그가 열어젖힌 전국의 한옥은 다 셀 수가 없다. 고택(古宅)을 지키는 종손(宗孫)은 함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먼저 한옥 안팎을 깨끗이 쓸었어요. 떡을 해서 돌렸지요. 말을 트고 사진을 보여드렸어요. 그제야 대문이 열리데요. 문설주와 기둥을 찍고,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찍고, 처마와 지붕을 찍었지요. 봄꽃, 여름 하늘, 가을 단풍, 겨울 눈꽃이 핀 한옥을 무시로 촬영했어요. 한옥은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죠. 한옥의 속 모습은 곧 선조의 삶이었어요. 그렇게 10년이 훌쩍 흘렀네요.”

이씨가 24일부터 4월 6일까지 서울 관훈동 토포하우스에서 여는 첫 개인전 제목은 ‘오래 묵은 오늘’이다. 작가가 온 몸으로 만나고 기억한 한옥 사진 수만 점 가운데 고른 스물한 점을 내놨다. 어린 시절 한옥에서 뒹굴며 살았기에 저절로 밴 오래 묵은 옛 향취가 오늘에 되살아났다.

“한옥에 들어앉아 마음을 비우고 카메라 앵글 가득 자연을 채워 넣었어요. 한옥이 스스로를 열고, 비우고, 그 자리에 자연을, 문화를, 삶을 채워 넣은 것처럼.”

작가는 그 과정에서 한옥과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쉽고 편리한 삶을 버렸던 종손의 자긍심을 보았다. “그 분들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눔과 베풂입니다. 이웃을 섬기고 나라를 걱정하며 살던 집안의 한옥에 들어서면 정갈하고 진솔한 기운이 집에서 흘러나와요. 한옥을 보존하려면 모양새만 본떠선 안 되죠. 그 정신과 마음가짐까지 이어야 진정한 한옥 전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묵은 오늘’이란 전시제목에 담은 뜻을 작가는 이렇게 풀었다. 그가 선보인 사진은 우리가 오랫동안 한옥을 버렸던 까닭을 넌지시 일러준다. 02-734-7555.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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