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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유치한 당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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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최근 친구 하나가 일본 출장 도중 심근경색을 일으켜 응급실 신세를 졌다. 도쿄 어느 대학병원의 우수한 의료진이 꽉 막힌 관상동맥을 능숙하게 뚫고 스텐트 시술을 했다. 덕분에 그 친구는 살아났고 정상을 회복했다. 문제는 진료비였다.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이 이방인 환자에게 청구된 진료비는 5000만원! 그러나 이 금액에 놀랄 필요는 없다. 미국이라면 1억원은 족히 넘었을 테니까. 한국은 얼마일까? 단돈 600만원! 보험환자에겐 300만원이면 족하다.

국민들은 이 매혹적인 건강보험이 그냥 유지되기를 바라겠지만, 공짜 좋아하는 국민 심성의 뒤편에서 보험제도의 기반이 썩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당장 작년 한 해 건보재정에 1조7000억원의 적자가 났다. 적게 내고 풍족하게 쓴 탓이다. 보험료율 인상 없이 이 멋진 제도가 유지될 리 없는데, 누구도 보험료를 올리자고 나서지를 못한다. 그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다. 실업보험은 어떤가? 실직자 300만 명 시대가 코앞인데 실직수당을 받는 사람은 한 줌에 불과하고, 받는다 해도 생계비의 30%도 안 된다. 비교적 괜찮다고 평가받는 연금도 고작 노인인구의 20%에 혜택을 주고 있을 뿐이다.

이게 선진국클럽 회원인 한국의 복지현실이다. ‘돈 먹는 하마’인 건강보험을 빼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복지국가’ 축에 끼지 못한다. 유럽국가들은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이미 근사한 사회보장을 완성했고, 우리가 비교상대로 쳐주지 않는 남미에도 우리보다 나은 국가들이 더러 있다면,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권리’에 대한 국민의 무지, 또는 정치후진성을 뜻한다. 복지는 크게 4대 보험, 사회서비스, 빈곤정책으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비중을 6:3:1 정도로 보면 된다. 한국의 현실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과 비교하면 세 가지 모두 과락(科落)을 면치 못한다. 가장 절박한 문제는 모든 국민을 4대 보험에 편입시켜 사회적 위험을 줄이는 것이고, 노인·여성·청소년·유아 등 취약집단에 사회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그다음이다. 우선 급한 것을 꼽아봐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정치권을 달구는 ‘무상급식’이 한국의 현실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리스트 중 가장 끝에 놓일 만한 것이다. 민주당은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정책과제를 핀셋으로 끄집어내 정치쟁점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무상’이라는 공짜기표가 국민들의 복지심리와 공명했고, ‘밥’에 담긴 민생적 의미가 권리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빈곤정책’에 속한 무상급식을 ‘사회서비스’로 격상시키고, 실로 오랜만에 ‘복지’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민주당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런데, 복지 몸통에 해당하는 개혁과제를 다 놔두고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무상급식인가를 묻는다면,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4대 보험 개혁엔 대규모 저항이 따르고, 사회서비스 신설은 지지와 반대가 엇갈린다. 빈곤층에 대한 시혜와 복지의 보편성을 결합한 무상급식 아이디어는 대중적 인기를 단번에 독점할 수 있는 정치적 묘수임에 틀림없는데, ‘복지국가 만들기’에서 진보정당이 해야 할 역사적 행보를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 유치함은 허를 찔려 쩔쩔매는 한나라당의 어설픈 대응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장기판에 비유하자면 ‘졸(卒)’에 해당하는 수(手)에 전세가 마구 흔들리는 꼴이다. 그 정도의 공세로 허둥댄다는 사실은 집권정당의 복지정책이 허술하다는 뜻이고, 보수 진영의 복지원리가 맹탕이라는 것을 말한다. 약간 정신을 수습한 한나라당은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확대’로 맞받아쳤으나 이미 프레임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부유층에게도 공짜점심을 주자는 진보의 제안이 어이가 없더라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보수의 정석이다. 복지제도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진보는 공세, 보수는 수용’이 복지국가의 방정식임을 유럽의 역사가 말해준다. 그러니, 몸체를 건드려 판을 더 험악하게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냥 받는 것이 좋다. 그러나 ‘복지국가 만들기’ 출발선에서 고작 무상급식을 꺼내든 진보의 저급한 지혜와, ‘공짜 점심은 없다’는 원초적 입장과 표 계산 사이에 끼여 주춤거리는 보수의 궁핍한 항변에 대해 이런 말은 해두고 싶다. 유치한 당신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