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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 앞으로 10년이 마지막 기회] 1.<메인>농사도 사업, 농민도 경영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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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대규모 가공시설을 갖춘 중국 저장(浙江)성의 한 농업 전문회사에서 종업원들이 위생복을 입고 농산물을 손질하고 있다. 저장성에만 이런 대형 농산물 가공공장이 50개에 이른다.

쌀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으로 외국 쌀의 수입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동네 소매점에서도 외국 쌀이 팔리게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쌀 협상 결과에만 연연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수입 규제의 보호막 속에 안주해 온 농업의 체질을 바꾸지 않고선 협상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년이 우리 농업의 운명을 가를 마지막 기회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중국.유럽 등 해외 현장취재를 통해 우리 농업이 나아갈 방향을 5회에 걸쳐 모색해본다.

프랑스의 드골 국제공항 인근 콤팡 지역의 여성농민회장인 코린 캐캐르(45)는 사장 직함이 두 개다. 이름만 사장이 아니다. 그는 120ha(36만평)의 밭에서 밀과 사탕수수 등을 경작하는 농업회사의 대표이자 농촌관광 회사의 대표다. 그는 남편.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민이지만 다른 프랑스 전업농들처럼 자기 사업체를 법인으로 등록했다. 매출의 5.5%를 부가가치세로 꼬박꼬박 낸다.

"농사도 사업인 만큼 당연히 법인으로 등록하고 세금도 내야죠. 전 경영인입니다."

그는 "농민이라는 말은 정부의 지원만 받고 어렵게 산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안 쓴다"고 말했다. 농민은 식량 생산자를 넘어 상품을 잘 팔기 위해 노력하는 '농업경영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 농업도 경영이다=캐캐르의 농가에서는 닭 모이 주기나 우유 짜기 같은 농촌체험 프로그램도 어엿한 상품이다. 입장료로 어린이 4유로(약 6000원), 어른 10유로(약 1만4500원)씩 받는다.

"왜 돈을 받느냐고요? 아이들 눈에 농민이 노는 사람으로 비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농가를 찾아온 아이들이 그를 보고 "출근 안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농사 짓는 것도 직장에 출근해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파리 남부 욘 지역에서 포도를 경작하는 장 밥티스트 티보(32)는 요즘 매일 농업회의소가 여는 야간 경영학교에 나간다. 그는 최근 회계사.경영컨설턴트와 함께 포도주 수출조합을 만들었다. 자체 상표로 포도주를 만들어 직접 해외시장을 뚫을 계획이다.

중국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 있는 '중다신디(中大新迪)'는 농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이 회사는 구매자가 원하는 품질과 가격에 맞춰 재배 품종과 방식을 정한다. 이른바 '맞춤 생산'이다. 지난해에 월마트.카르푸 등 세계적 유통업체에 신선야채.과일 등 농산물 80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저장성에만 이런 회사가 50개 있고, 여기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95%가 수출된다. 중국에서는 농민이든 비농민이든 농산물을 더 잘 팔 수 있다면 누구든 투자자를 모아 농업기업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은 농업회사를 만들려면 반드시 농민이 사장을 맡아야 하고, 이사의 절반이 농민이어야 한다. 또 농민 출자가 총출자액의 절반을 넘겨야 하기 때문에 농업회사를 세우기가 어렵다. 정부는 최근에야 이 규정을 완화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기업농이 적다 보니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10년간 62조원을 농업에 쏟아부었지만 전체 농가의 62%는 여전히 영농 규모가 1ha(3000평)에도 못 미치는 영세농이다.

하석건 파리 지역아카데미 박사(경제학)는 "농민들이 경영전문가가 돼 기업농으로 발전하거나 사업 다각화를 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라며 "한국은 아직도 땅만 보고 사는 가난한 소농(小農)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식량에서 상품으로="중국 쌀이든 태국 쌀이든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지난 5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 중심가에 위치한 후이진(匯金) 백화점 식품 매장. 태국산 향미를 사는 30대 초반의 은행원 부부는 "왜 중국 쌀을 두고 태국산을 사느냐"는 질문에 "마음에 드는 쌀을 사는데 무슨 문제냐"고 되물었다.

이 백화점 쌀 판매대의 절반은 홍콩의 곡물 수입업체인 '골든리소스(金源米業)'가 납품한 수입 쌀이 차지한다. 이 회사는 태국과 호주 등에서 현미를 수입해 정미한 뒤 상하이와 광저우(廣州)의 백화점에서 팔고 있다. 원자재를 사서 가공한 뒤 파는 게 공산품과 다를 바 없다. 쌀값도 다르다. 최고급 태국산 향미는 5㎏에 59위안(약 8300원)인 반면 장쑤(江蘇)성에서 생산된 쌀은 24위안(약 3400원)에 팔린다.

일본 도쿄의 대형 할인점 이토요카토에서는 품종에 따라 쌀값이 확연하게 다르다. 최고급으로 꼽히는 우오누마(魚沼)산 '고시히카리'는 5㎏짜리가 4600엔(약 4만6000원)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최고급으로 꼽히는 이천.여주.철원 쌀과 일반 쌀과의 가격 차는 15%에 불과하다. 쌀 가격이 정부의 수매가를 기준으로 비슷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쌀값을 정하는 구조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훨씬 반시장적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당장 쌀 수입이 늘어나는 것보다 시장지향적인 세계 농업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는 우리 농업의 체질이 더 문제라고 걱정한다. 우리나라의 최대 쌀수출국인 중국은 쌀 협상에서 "시장을 개방하는 게 세계 무역의 대세인데 왜 한국은 자꾸 예외를 요구하느냐"며 다그쳤다. 최용규 세계농정연구원장은 "농산품이 국경을 초월해 하나의 상품으로 유통되는 시대에 맞게 우리 농촌도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콤팡.캔(프랑스), 항저우.상하이(중국), 도쿄(일본)=특별취재팀
◆ 특별취재팀=홍병기 경제부 차장, 김종윤.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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