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오른쪽)은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 쓰시마로 끌려가 단식투쟁 끝에 그해 12월 30일 귀천했다. 쓰시마로 끌려갈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은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생생히 전해준다. (출처=『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왕조의 명운이 기울던 그때. 뜻있는 선비들은 두 가지 길을 택했다. 하나는 “나라가 망하면 유교의 도 또한 망한다(國亡而道亦亡)”는 생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거나 자결해 지조를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가 망해도 도는 망하지 않는다(國亡而道不亡)”는 생각에서 숨어살며 공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다. “변(을사늑약)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건만, 토벌을 꾀하는 이가 왜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임금이 없어지면 신하가 어찌 살아가며,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어찌 보전되겠는가? 가마솥의 생선은 머지않아 삶아질 것이며,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는 얼마 안 가 타 죽을 것이다. 결국 죽고야 말건대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팔도 사민(士民)에게 보내는 포고문’, 1906년 6월 9일) 전자의 길을 걸은 최익현은 7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지 쓰시마에서 단식 끝에 순절했다.
물론 그때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왕조와 유교적 가치였기에 시대착오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기리는 이유는 둘일 것이다. 하나는 그가 기득권이 아닌 자신이 지키려던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우리 역사상 희유(稀有)의 위인이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 시민 사회가 반대파 정객이나 침략자까지 고개 숙이게 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큰 정치에 목마르기 때문일 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