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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언론보도와 명예훼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묻는 소송이 급격히 늘고 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접수된 중재신청사건 통계를 보면 1988년에 55건이던 것이 98년에 6백2건을 기록해 10년만에 10배 이상 증가했고, 법원에 접수된 언론사를 상대로 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청구 사건과 가처분 사건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절대적이지 못한 알권리

언론에 의한 명예훼손을 법에 호소하는 계층도 다양화돼 일반인은 물론 정치인.종교인.교수.기업인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들도 언론기관과 언론인을 상대로 소송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검사 등 국가기관이 언론보도로 인해 명예를 훼손 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언론사가 다른 언론사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과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소송이 잇따르고 있어 일반 국민을 놀라게 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19조는 "모든 사람은 모든 수단에 의하여 국경을 초월하여 정보와 사상을 탐구하거나 입수 전달할 자유를 갖는다" 고 개인의 알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알권리도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어서 국가 안전보장, 개인의 명예나 프라이버시, 기업 비밀 등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제한되는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아래에서는 주로 국가안보와의 관계에서 국가에 대한 언론의 책임이 문제돼 왔으나, 김영삼(金泳三)정부 이후에는 개인의 명예 등 인격권과의 관계에서 개인에 대한 언론의 책임이 논의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됐다.

한편 일반 국민은 언론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론에 보도된 것은 곧 진실이라고 믿고 언론의 논평을 곧 정의라고 믿는다.

언론보도의 영향력이 극대화돼 있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언론은 흔히 입법부.사법부.행정부에 더하여 제4부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어느 법학 교수는 권부.언부.재부의 신삼권분립을 논하고 있기까지 하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언론은 일반 국민에게 무소불위의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기관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개인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언론의 법적 책임을 묻는 경우에 우리나라 사법부는 과거에 비해 언론의 자유보다는 개인의 명예를 더욱 보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법원 판결이 제시하는 기준을 보면 보도한 사실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 때에는(공익성), 진실이라는 증명이 있거나(진실성), 증명이 없더라도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상당성)에 한해 위법하지 않다고 한다.

특히 공적인 인물(public figure)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미국의 판례(New York Times Co.vs.Sullivan)는 공무원인 원고에 대한 보도가 현실적인 악의(actual malice)가 있음을 원고 스스로 입증하지 않는 한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고 하여 언론기관의 책임을 부인했으나 우리나라 대법원은 유사한 경우에 현실적인 악의에 대한 입증 없이도 언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확인 소홀하면 안돼

법원에서 인정되는 손해배상 금액도 날이 갈수록 불어가는 추세여서 과거 90년대 초반까지는 천만원 이하의 위자료가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수천만원의 위자료를 명하는 것이 일반화돼 가고 있으며 수억원의 위자료를 명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게 나오고 있다.

이러한 위자료 고액화 추세에 대해서는 언론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우려하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확인에 소홀한 선정적인 언론보도의 폐해를 우려하는 국민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언론은 알려야 할 책무와 알린 데 따른 책임 사이에서 고뇌하는 것이 그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직업 저널리스트 협회의 윤리강령은 "부정확하거나 주도면밀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오보를 신속하고 완전하게 정정하는 것은 언론의 의무다" 라고 천명한다.

이것은 국민의 명예와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언론이 외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선진언론으로 진일보하기 위한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한상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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