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25>평론에 별점을 매겨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8호 05면

지난주 런던에서 ‘오페라의 유령’ 속편을 봤다. 제목은 ‘러브 네버 다이즈’. 두 시간이 조금 넘는 뮤지컬을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애매했다. 딱히 좋다 나쁘다고 단정 짓기 힘들다고 해야 할까. 작품 그 자체로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보는 내내 머리를 맴돈 건 1편의 그림자였다. 유령이 노래를 부를 땐 자꾸 1편의 ‘밤의 노래’가 귀에 맴돌았고,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입체영상이 무대를 장악할 땐 샹들리에가 쿵 떨어지고 촛불이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1편의 아날로그 무대와 자꾸 비교하게 됐다. 이래서 “1편보다 좋은 속편이 나오기란 어렵다”는 말이 있을 게다.

9일 ‘러브 네버 다이즈’ 공식 개막 이후 반응은 그다지 후한 편이 아니다. 런던 안에서도 그랬고, 특히 바다 건너 뉴욕 타임스의 리뷰가 가장 셌다. 벤 브랜틀리라는, 뉴욕 타임스의 수석비평가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라는 세계적 거장과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아우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관점과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표현만큼은 나를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웨버의 최신작이 이토록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줄이야”라든가 “이번 공연은 너무 심각해서 관객이 조금의 미소를 짓는 것도 어색하게 만들었다” 혹은 “첫 번째 ‘팬텀’을 모른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만약 첫 번째 ‘팬텀’을 알고 있다면,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등등. 그의 리뷰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꽤 화제라고 한다.

요즘엔 이런 글로도 부족해 눈에 쏙 들어오는 별점을 매기는 게 대체적인 흐름이다. 몇 년간 온갖 고생을 해 겨우 올린 작품을 마치 껌 씹듯 단 몇 개의 별점으로 후다닥 평가를 내리니, 아마 제작자들은 겉으론 의연한 척해도 속으론 잘난 체하는 비평가나 기자의 머리를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일 테다.

그나마 외국에선 이런 시니컬한 비평이 화제라도 된다. 한국은? 글쎄 최근 몇 년간 대중에게 회자된 리뷰가 있었나 싶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을 한 번 보시길. 지난해 『공연과 리뷰』에 나온 연극 ‘파우스트’에 대한 글이다. “배우들의 존재방식을 조건 짓는, 즉 연기환경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 메인 행동은 배우의 행동을 활성화하고 이렇게 활성화된 배우의 에너지에 의해 개념의 이미지가 상승하는 상호의존적 활성화된 순환 관계의 에너지를 통해 개념/배우/이미지가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가게 된다.”

과연 이것이 한국말이던가. 하나만 더 보자. 지난해 『연극평론』에 나온 글이다. “스스로의 추방으로 인한 존재론적 소외와 방랑의 이미지로부터 벌거벗은 진실을 밝히는 앎의 세계(지혜/거울), 이 두 요소를 밝은 광선 아래 병치함으로써 안전하게 밀폐된 원텍스트의 내면성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이 정도면 감히 ‘누가 누가 더 난해하게 쓰나’ 경연대회 1등감이다. 이런 글을 보면 독자들은 ‘난감’하다 못해 ‘망연자실’하지 않을까. 해독 불가능한 글로 타인의 작품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고, 본인은 정말 자신의 글을 이해하면서 쓰는지도 궁금하다.

근데 문득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목덜미가 땅기는 건 왜일까. “너나 잘하세요”라고? ‘까칠한 무대’에 별점을 매긴다면 과연 몇 개? 별 한 개 반!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성역은 없다'는 모토를 갖고 공연 현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더 뮤지컬 어워즈’를 총괄 기획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