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가쟁명:유주열] 중국의 쉰들러

중앙일보

입력

미국의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1993년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유대인이기도 한 스필버그 감독이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나치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1200명을 자신의 공장에 고용시켜 학살을 면하게 해 준 실업가 오스카 쉰들러(1908-1974)의 이야기를 영화화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일본의 쉰들러”라고 하면서 스기하라 치우네(杉原 千畝)라는 외교관을 소개하였다. 스기하라는 1940년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에서 일본영사로 근무할 때 나치 독일에 쫓겨 도망 나온 폴란드 유대인에게 일본 통과비자를 발급하였다.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였기에 독일이 원하지 않는 유대인의 탈출을 돕는 비자 발급은 일본 외무성 훈령에 의해 불허되어 있었다. 스기하라는 본성 훈령을 어기고 인도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이른바 “생명의 비자”(命の査證)를 발급하였다. 6000여명의 유대인이 스기하라의 서명이 들어 있는 비자를 받아 시베리아를 경유 동해를 건너 일본의 쓰루가(敦賀)항에 입항할 수 있었다.
2008년 1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점시절 비엔나 중국 총영사였던 허펑산(何鳳山)을 기념하는 기념패 제막식이 있었다. 옛 중국영사관 건물이 보이는 식장에는 이스라엘, 미국, 중국대사 뿐만이 아니라 비엔나 유대인 협회 회장이 참석하였다. 언론에서는 허펑산을 “중국의 쉰들러”를 크게 보도하였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많은 오스트리아의 애국자들이 조국을 떠났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인 폰 트랩 가족도 이 무렵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를 통해 미국으로 탈출하였다. 현지의 유대인들은 불안에 떨었다. 나치 독일의 경찰에 붙잡히면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안 허펑산은 유대인들에게 상하이(上海) 입국비자를 발급하였다. "생명의 비자"(生命簽證)였다. 독일 베르린에 주재의 당시 국민정부 대사는 주재국 나치 독일이 싫어하는 유대인에 대한 비자발급을 불허하였으나 何총영사는 자신의 신상에 미칠 위험을 돌보지 않고 1940. 5. 본국 소환될때 까지 2000여명의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하였다.
스기하라와 허펑산으로부터 생명의 비자를 받은 유대인들과 독일과 항가리 루마니아등 나치 점령지역을 탈출한 유대인들이 상하이로 몰려 들었다. 2만명에 가까운 무국적 신분의 난민이었다.대부분 국가들이 유대인 난민을 받아 주지 않았으나 상하이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여권이며 비자가 없어도 상륙할 수 있는 자유항이었다. 이미 상하이 진출해서 크게 사업에 성공하고 있던 중동계 유대인들은 탈출해 온 유럽 유대인들을 위해 상하이 虹口지역에 허름한 아파트를 빌려 유대인 촌 즉 게토를 만들어 살도록 하였다. 사쓴家와 카도리家가 중심이 되었고 미국의 유대인 자선단체가 도왔다. 2차대전이 끝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떠날 때까지 상하이는 어렵지만 유대인에게는 목숨을 이어 준 생명의 땅이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 건국한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중 유대인을 도와준 전 세계의 정의로운 인물을 발표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스기하라 치우네와 함께 중국의 허펑산도 영광스럽게 올라있다. 1992년 중국과 이스라엘이 수교후 상하이에 진출한 이스라엘의 기업인들은 상하이 시정부에 거금을 희사하였다. 상하이가 전쟁중에 유대인을 보호해준 고마움에서였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중앙일보 중국연구소가 보내드리는 뉴스레터 '차이나 인사이트'가 외부 필진을 보강했습니다. 중국과 관련된 칼럼을 차이나 인사이트에 싣고 싶으신 분들은 이메일(jci@joongang.co.kr)이나 중국포털 Go! China의 '백가쟁명 코너(클릭)를 통해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