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달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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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들으리라, 너희들은, 한때 찬란하였던 별 아래서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 연탄장수는 검은 리어카를 끌고 고물장수는 고물차를 끌고, 공순이는 핸드백을 메고 목도리를 두르고, 심지어 네다바이 좀도둑꺼정도 잠바를 걸치고 껌을 쩍쩍 씹으면서 바삐바삐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를. "

최하림씨의 시 '산동네' 를 읽으며 우리에게 달동네는 이제 추억인 줄만 알았다.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는 40대 이상 대부분은 이 달동네 삶을 거쳐왔을 것이다. 달이 가장 낮게 뜨고 그만큼 낮은 지붕 아래 우글우글 살던 때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으로 하여 우리는 바삐바삐 살며 속속 아파트로, 중산층으로 편입돼갔다. 해서 국내 대표적 사진작가들이 60, 70년대 달동네의 삶을 다룬 작품전시회를 최근 가지며 그 명칭을 '미명의 새벽' 이라 했다. 그들의 흑백카메라 앵글은 가난하고 초라하더라도 인정과 희망을 잡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동네는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한쪽 현실임이 중앙일보의 현장 리포트 '서울 달동네 신림7동 산101번지 난곡' 에서 드러났다.

아침에 꾹꾹 참아가며 줄서 기다리던 공동화장실, 연탄가게와 구멍가게의 풍경이 그대로 남은 그곳은 특히 희망이라곤 전혀 없이 실업이 고착화하고 근로의욕이 감퇴하며 장래에 대한 극도의 절망감뿐인 '빈곤의 함정' 에 빠져들고 있다는 보고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6.25후 청계천변 등 서울 도심에 들어서기 시작한 판잣집들이 60년대에 철거되면서 주위 고지대로 올라가고 또 경제개발로 농촌에서 서울로 몰려들면서 달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달동네는 정착개념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극빈층에서 중산층으로 가는 정거장이었다. 엄청난 학구열과 노동열, 그리고 개발로 그들은 속속 달동네를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 개발과 재개발의 혜택에서 제외된 일부가 빈곤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달동네 실상이 전해지면서 어떻게든지 돕겠다는 온정이 쏟아지고 있어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아니 이런 온정은 달동네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 사회 자체의 희망이다. 나혼자만 앞서려는 것이 아니라 뒤처진 자와 함께 손잡고 나가려는 사회는 아름답다.

가난하고 고달퍼도 나눠 먹고 함께 잘 살아보려고 서로 노력하던 달동네 시절의 환한 달빛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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