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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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52. 변동환율제 채택

당시엔 '강철 같은 위장' 이 공무원의 출세 조건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공무원이 술을 끊는다는 것은 출세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김원기 재무장관에게 금주.금연을 공인받은 셈이었다.

그 때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술을 끊는 첫째 비결은 '어느 누구와도 마시지 않는 것' 이다. 살기 위해 술을 끊은 나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골프를 시작했다. 남 눈치보지 않고 열심히 휘둘렀다.

당시 골프를 열심히 친 사람으로 고 신병현(申秉鉉) 전 부총리가 있다. 재무장관 시절 나는 사석에서 전두환(全斗煥)대통령에게 "공직자들이 골프를 삼가고 있지만 신병현씨는 골프가 유일한 취미이기 때문에, 나는 살기 위한 방법으로 골프를 계속 치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언제 골프 치지 말라고 했느냐" 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한 번 나가면 경호비용까지 4백몇십만원이 든다고 해서 난 재임 중에 안 치겠다고 한 게지. "

그의 말대로라면 당시 공직자들이 골프를 삼간 것은 '과잉충성' 이었다. 나는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일도 있다. 재무차관 승진을 한 직후 청와대 주최로 골프대회가 열렸을 때다. 全대통령도 참가한 대회이다 보니 군출신 인사들은 점수를 조절해 가며 쳤다. 그 바람에 내가 우승을 한 것이다.

全대통령은 퇴임 후 여러 번 나를 골프 모임에 초대했다. 1994년 내가 홍콩의 중기투자관리유한공사 총재로 나가게 되자 국산 골프채 한 세트를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해외에 나가 국산채 광고도 좀 하고 그러라면서.

다시 환율 이야기를 하자. 요즘 환율이 급등하고 있지만 환율은 높든지 낮든지 항상 중요하다. 8.15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환율은 달러당 17원이었다. 그 땐 달러 공매제도가 있었다. 정부보유외환자금(KFX)을 한국은행이 수입 업자들을 상대로 입찰을 했다. 그 시절 환율이란 이렇게 이루어진 공매의 평균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단일한 환율제도 실시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64년 5월 3공화국 정부는 단일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 이와 함께 달러당 1백30원에서 2백55원으로 공정환율을 현실화했다. 첫 환율개혁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고정환율제도를 실시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는 변동환율제를 굉장히 일찍 시도한 셈이다. 미국이 한국을 테스트 케이스로 삼아 변동환율제를 적용해 본 것이다. 당시 한국은 미국 원조당국(USAID)을 창구로 원조를 받고 있을 때였다.

환율개혁 작업을 할 당시 나는 결혼 1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첫 아이를 막 낳았을 때였다. 해외연수에서 돌아온 내게 이재설(李載卨) 외환과장(전 농수산부 장관)이 다음 날 아침 워커힐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한국은행 박인수 대리(전 외환은행 이사), 외환과의 이용성(李勇成.전 은행감독원장)씨와 함께 워커힐호텔 빌라에 가명으로 투숙했다. 방에 종일 틀어박혀 작업을 하느라 식사는 룸서비스로 해결했다. 형사들이 지키고 있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몇 달 동안 외국에 있다 온 나로서는 하루 세 끼를 샌드위치로 때운다는 것이 고역이었다.

밤이면 김유택(金裕澤) 부총리가 재무장관.외환과장과 함께 찾아왔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일단 귀가를 했다가 택시를 타고 와 밤 늦도록 회의를 했다. 중간에 부총리가 바뀌어 장기영(張基榮)부총리가 임무교대를 했다.

5월 3일 토요일 오후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거쳐 전격적으로 환율개혁을 발표했다. 월요일 아침까지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일요일 아침 워커힐에서 철수하는데 워커힐 택시 기사가 달러로 계산해 택시요금을 받았다. 새 환율을 적용하는 바람에 택시비를 두 배 가까이 내야 했다. 어쩌면 내가 작업한 환율개혁의 첫 적용 대상자가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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