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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에세이] 유지선 IBR 사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5면

3년 전 미국에서 한 인터넷데이터센터(IDC)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고객과 통화를 마친 직원이 급히 컴퓨터 통제실을 나서더니 해당 업체의 서버와 연결된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고객이 잠시 전원을 차단해달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직원은 돌아오자마자 그 고객에게 비용청구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고작 스위치 하나 내리는데 요금을 내라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우리 정서로 볼 때 IDC에서 전원 관리는 당연히 해야 할 기본 서비스 중 하나다. 그런데 미국에선 고객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게 바로 '미국식 고객 지향 서비스 정신'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필요한 사항만 기본으로 두고, 대부분의 작업은 부가 서비스다.

귀국 직후 나는 인터넷 사업을 하면서 서비스 개념을 '고객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으로 규정했다. 무엇으로 긁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제대로 긁을 수 있다면 전원 스위치를 차단하는 단순 서비스라도 돈을 받는 상품이 된다는 철학이다.

국내 인터넷 업계가 최근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서비스 정신이 왜곡돼 있어서다. 요즘 인터넷 시장의 화두는 유료화다. 업체들은 살아남으려고 돈이 되는 서비스와 아이템 개발에 열심이다. 화면을 화려하게 꾸민다든가, 메뉴들을 다양하게 만드는 등 비용을 들여 새 단장을 하고 사업 범위를 넓힌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들이 과연 고객의 입장에서 만들어졌는지, 혹은 네티즌이 정말 필요한 메뉴인지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서비스가 개발자나 사업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억지 춘향식' 으로 수요를 창출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어느 회사에서 새 서비스를 개발해 성공하면 경쟁사도 바로 비슷한 메뉴를 제공하는 '줄서기 식' 서비스도 흔하다. 차별화되지 않으니 단골이 없다. 가짓수는 많지만, 고객에게 도움이 안된다.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는 세상을 바꿀 만한 획기적인 것이 아니다. 당장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 인터넷 업계가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 열중한 나머지 고객 요구를 수용하고 각자의 강점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데 인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끓어 넘치는 주전자의 뚜껑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지혜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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