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다지자] 74. 엉터리 배관 설계도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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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몇년 전 울산공단 내 S사에서는 식당의 수도꼭지와 샤워장에서 구정물이 흘러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이 회사 공무과장은 낡은 상수도관을 교체하기 위해 자료실에 보관 중인 도면을 토대로 일정 구간의 노후 배관을 철거하고 새 배관을 설치토록 했다.

그런 뒤 신설 배관을 상수도 본선과 연결해 물을 공급하려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조사를 해 보니 도면이 엉터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산업도면전산화 진흥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업의 90%가 현장과 일치하지 않는 도면을 보관하고 있고 자료정리도 형식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남아있는 배관 도면도 노후화해 해상도가 떨어지고, 도면의 일부를 잃어버린 경우도 많다.

울산.여천 등 공업단지에서는 고온.고압의 시설물과 부식이 심한 유독성 물질을 관리하는데 청사진 도면을 활용하고 있다. 이 도면은 30여년 전 공장을 지을 때 만든 것으로 종이로 돼 있다.

심각한 문제는 이 도면이 그동안 시설물을 증.개축하는 바람에 거미줄같이 얽힌 배관망과 각종 장치를 관리하는 자료로서의 활용가치를 이미 잃었다는 점이다. 건설 당시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지상.지하 배관의 청사진 도면관리는 이미 한계에 달해 체계적인 관리가 거의 불가능하다.

유독성 물질을 운영 또는 생산하는 이들 공장에서 정확하고 정밀한 배관 도면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형사고가 언제든지 터질 수 있음을 뜻한다. 또 사고가 났을 경우 복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1995년 발생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사고나 94년 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등도 현장과 일치하는 정확하고 정밀한 도면만 유지.관리했다면 방지할 수 있었던 재해였다.

신혜경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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