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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칼럼] 공산명월과 흑싸리 껍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새 시대' 건설을 역설했다. 그 광경은 온통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정작 내놓을 평화의 선물이 마땅찮았다.

중국한테는 미군의 대만 철수가 평화의 조건이고, 미국으로서는 대만에 대한 중국의 주권 포기가 평화였기 때문이다. 50여번의 마오타이 건배 및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15시간의 단독 회담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애초에 좁혀질 이견이 아니었다.

*** 미 ·러 둘러싼 외교 '헤프닝'

초조하기로 말하면 먼저 찾아간 쪽이 심할 터여서 마침내 닉슨은 "미국의 군인과 군사 시설을 대만에서 철수하는 것이 궁극적인 과제" 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궁극적 과제를 말 그대로 '궁극적으로만' 고려할 심산이었고, 중국 역시 상대의 그런 배짱을 모를 턱이 없었다. 그래서 周는 회담 성과를 밝혀달라는 질문에 "모든 사실이 저절로 밝혀지도록 할 것" 이라고 대답했다.

전혀 지킬 마음이 없으면서도 궁극적 과제 따위로 둘러대는 수작이든, 상대의 속셈이 뻔하지만 그래도 지켜보겠다는 식의 '만만디' 응수든 모두 외교학 교본의 기본일 터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의 퇴임 전후에 벌어진 일련의 '해프닝' 은 약한 나라가 사는 길이 무엇이냐는 질문과 함께, 도대체 우리 외교에는 이런 기본조차 없느냐는 탄식을 토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23일 李전장관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 국회 연설에서 주한 미군 철수를 거론하려고 했고,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위(NMD) 계획에 한국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막후 비화를 공개했다.

물증은 없으나 심증은 충분한 일이었다. 한 나라 외교의 수장으로서 깊이 묻어둘 국가간의 비밀을 까발린 것이 과연 옳은 처신이었는지는 나 역시 의문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터지고 난 뒤의 수습책이 한층 더 졸렬하게 비쳤다. 청와대는 즉시 "중대한 착각" 이라면서, 사태를 장관의 자질 문제로 덮으려고 했다. 상대가 결코 믿지 않겠지만 믿어주는 척만 하고, 장관의 착각 대신 미국과 러시아의 착각을 바란 것이었을까.

무슨 연고인지 李전장관은 한국의 완곡한 동의 거부에 "그러면 지지 요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하자" 고 했다는 미국의 은밀한 요구까지 털어놓았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청와대는 여전히 NMD와 관련해 "미국이 지지를 요청한 적이 없다" 고 주장하고 있다.

NMD는 북한이 과녁이라는 점에서 우방과의 협력이란 단순한 관점으로만 다룰 문제가 아니며, 더욱이 남북 화해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으로서는 간단히 받아들일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 마오타이 없이도 모든 사실이 저절로(!) 밝혀졌는데 정부는 왜 그토록 숨기려는 것인가□ 괘씸 죄 보복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할 무슨 묘수가 있기 때문인가□

27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부시와의 회담에 실망한 金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한반도에서의 역할 강화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과 다르다면서 "金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이후 EU의 고위 관리를 만나거나 EU에 이런 뜻을 전한 사실이 없다" 고 알리바이까지 내세웠다.

글쎄 딴마음(?) 혐의를 벗기 위해 정녕 이래야만 하는지, 미주알고주알 해명이 당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구차스럽게 느껴졌다. 때마침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과 세계와의 교섭에서 EU가 맡으려는 역할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젠장, 이거 약 주는 거야, 병 주는 거야.

*** 사대주의 근성 반성해야

26일의 퇴임 회견에서 李전장관은 왜 국내 언론은 "미국 신문이 동으로 간다면 동, 서로 간다면 서로 쓰느냐" 고 야유조로 물었다. 신문 한구석에 칼럼이랍시고 끄적이는 나는 그렇게 낯이 뜨거울 수 없었고, 그래서 그날 밤 '쌍시옷 문자' 를 내뱉으며 연방 소주잔을 비웠다.

아니 그게 우리 죄란 말이야? 아무리 옳은 말씀을 사뢰어도 흑싸리 껍질 대하듯 귓등으로 넘긴 게 누군데? 외지는 오보를 내도 알리바이까지 주워섬기며 공산명월로 대하지 않았어? 먼저 반성할 것은 정권의 사대주의 체질이라구! 취임 이후 부시가 보인 좌충우돌 외교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임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준비된 대통령이 준비된 지혜를 보여줄 차례다. 퇴임 외교관의 마지막 충정이든 경질에 대한 용렬한 반발이든, 李전장관이 강조한 '자존 외교' 만은 민족 생존의 화두로 남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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