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어디나 숨어 있는 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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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빌 클린턴은 권좌에서 내려오고 정주영(鄭周永)은 영원히 눈을 감았다. 클린턴은 딸의 졸업식에서 축사도 못하는 처지가 됐고, 그의 치적으로 꼽히던 북한 포용정책도 후임자에 의해 뒤집어지고 있다. 정주영의 서산 농장은 구입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고 현대건설은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 실패.이별.죽음은 예약된 것

취임할 때 온갖 칭송을 받던 우리의 대통령에 대해, 고작 3년이 지난 지금은 레임덕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측은히 여기는 이들도 있다.

지난 개각도 법으로 정해진 임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피아측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든지 힘의 중심축 이동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표명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뽕짝 가수가 거리 테이프 장사의 스피커를 통해 "여자는 울면서도 거울을 보지만" 이라고 슬픈 목소리로 읊는다. 우리는 여자의 마음을 가졌나. 정주영의 영결식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내 삶의 무상을 생각한다.

나는 '인생일장춘몽' , 즉 "삶은 한 바탕의 봄꿈이다" 라는 구절과 함께 세상의 무상을 자주 말한다.

그러면 대부분 "아니 무량수라는 끝없는 수명을 향해 수도하는 스님도 무상을 느끼나요" 라고 반문한다.

어떤 이는 내가 흔들리거나 비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죽음을 벗어나 영원한 참생명을 얻으려고 도를 닦으면서 무상을 말하니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도의 기본이다.

'금강경' 은 세상만사를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아침이슬.번개와 같이 관(觀)하라고 가르친다. 만약 최고의 이상을 찾으면서 변하지 않는 형상이나 소리나 이름에 매달리면 도(道)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한다.

기독교의 '거듭 태어남'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과 물질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예수가 가르치는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으로 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이 궁극의 세계가 아니고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무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대부분의 액션영화도 무상의 눈을 가르친다. 처음에는 불행.죽음.이별.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행복의 햇살로만 가득한 장면을 그린다.

그러고는 음모.침입.파괴.죽음이 나오고, 복수가 시작된다. 주인공 곁에는 목숨을 걸고 협조하는 여자가 따르고, 악당을 물리친 후 둘은 같이 잘 살게 된다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있는데, 뭐가 그리 좋고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또 복수에 대한 반작용에, 왜 거기에서만 끝나겠는가. 주인공은 무상 또는 허무라는 렌즈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리라고 짐작케 한다.

재벌의 귀한 아들이 있다고 치자. 외국 유학까지 하고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그는 소형차가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 정도로 세상의 어려움을 모른다. 신문에 날 만한 또 다른 일을 저지르고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부모는 아들에게 세상에는 어려움과 재앙과 고통과 불행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인지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는다. 그 아들은 앞으로 죽음도 보고 이별도 볼 것이다. 만날 때 헤어짐이 예약된 것과 같이 오름에는 내림이 예약돼 있다.

슬픔이 없는 기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실패.이별.죽음이 가르치는 무상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는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세상을 제대로 알고 맛본다고 할 수가 없다.

*** 더 큰 성취를 위해 노력해야

무상하지 않다면 우리가 태어날 수도,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얻을 수도 없었다. 변화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면 무조건 버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더 큰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단지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 공평한 소유란 있을 수 없다는 것, 나는 임시 보관자라는 것, 아무리 많이 오래 갖고 있어도 언젠가 꼭 돌려줄 자세가 돼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 된다.

온세상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무상을 말하려고 한다. 모든 종류의 문학과 예술은 말을 못하는 우주의 대변자가 돼 무상을 설명한다. 우주의 말이 잘 안들리면 저들이 주는 보청기라도 이용해보자.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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