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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테이블] "약품 덤핑 여전…가격 더 투명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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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의약분업이 시행된지 몇달도 안돼 건강보험의 재정이 고갈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정치권·의사계·약사계등 이해 당사자들은 건설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채 서로 상대편이 잘못했다며 비난만 하고 있다. 이길이 의약분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다국적 제약회사의 경영자들이 지난 26일 중앙일보 회의실에 모여 새 제도의 정착과 국내 제약산업의 발전 방향에 관해 논의했다. 사회는 서울대학교 병원 임상시험센터장 신상구 교수가 맡았다. 좌담에는 한국얀센의 박제화 사장, 한국MSD의 폴리 사장, 한국아벤티스의 크레이크 켈리 부사장이 참여했다.

▶사회 = 의약분업이 시행 초기부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이 문제라고 보는가.

▶크레이크 켈리 = 건강보험 재정이 바닥 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의약품 가격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부 도매상들은 여전히 의약품을 병원.소매상 등에 덤핑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 등이 의약품을 구입한 뒤 건강보험에 보조금을 청구할 때 서류상으로 구입가격을 부풀리기 때문에 보험재정이 필요 이상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약값에서 이런 거품이 빠진다면 건강보험 비용도 많이 절감할 수 있다.

▶박제화 = 의약분업이 어떤 이득을 주는 제도인지 환자들이 알아야 한다. 의약분업 실시 후 병원을 찾는 사람이 30% 가량 늘었다. 몸이 아플 때 무분별하게 약국에서 약을 조제해 먹지 않고 의사의 정확한 진단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을 통해 의료환경이 개선된다면 환자들도 그만큼의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시민들이 자동차 보험의 혜택을 상세히 아는 것처럼 의료보험의 혜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폴 리 = 문제의 근원은 의약품의 가격체계나 시스템 운영의 잘못에 있는 게 아니다. 먼저 이 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쳐야 한다. 기본적으로 의약분업은 돈이 많이 드는 제도다. 대신 국민건강의 증진과 의료 서비스의 선진화를 가져다 준다. 따라서 의약분업으로 생기는 부담이 '투자' 라는 사실을 정부가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5%를 의료비로 쓰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의 경우 평균 8%인 점을 감안하면 낮은 수준이다. 이젠 의료 선진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강증진이 국가경제적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지 따져봐야 한다.

▶사회 = 의약분업을 지나치게 단기간에 정착시키려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수년 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해 현재 시행률이 30% 정도라는 점을 참고할 만하다. 의약분업 이후 다국적기업은 매출이 크게 는 반면 국내기업의 매출은 크게 줄었다고 하는데.

▶리 = 그렇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현재까지는 의약분업과 상관없이 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의약분업 이후 의사들이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약을 선택할 수 있게 돼 이해관계가 있는 특정회사의 약보다 효과가 좋은 약(다국적기업의 오리지널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늘어나리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 그런 분위기가 정착한 것은 아니다.

▶박 = 의약분업 이후 의약품 조제는 15% 가량 늘었지만 약값은 약 10% 내렸다. 따라서 매출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또 국내기업에 비해 다국적기업의 매출만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은 아직 통계로 안 나타나고 있다.

▶사회 = 국내에서는 복사 의약품(특허기간이 만료한 외국산 특허약을 복제한 약품)의 가격이 오리지널 의약품(원래의 특허약) 가격의 80~90% 수준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켈리 = 유럽에선 복사 약품의 값이 오리지널 약품 가격의 약 50%, 미국에서는 3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제약시장에서는 수요와 공급, 경쟁과 선택에 따른 시장원리가 통하지 않고 있다.

▶리 = 그동안 국내업체들은 복사 약품의 가격을 높게 매겨 수지를 맞춰왔다. 그러나 결국 이런 왜곡된 가격체계가 국내 업체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고 본다. 적은 비용으로 복사 약품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다 보니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에 막대한 돈을 들여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젠 국내 제약산업에도 시장의 원리가 적용돼야 한다. 군소 제약업체들은 다른 활로를 찾아야 한다. 경쟁 시스템이 갖춰지면 국내 상위 업체는 신약 개발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이다. 국제 경쟁력을 갖춘 복사 약품 전문 제조업체도 나타날 것이다.

▶사회 = 국내 임상시험 및 의약품 심사과정 등에서 개선할 점은 없는가.

▶켈리 = 임상시험 시설과 인프라가 아직 잘 갖춰지지 않았다. 국내 제약산업과 업계의 발전을 위해 이를 잘 갖추는 게 중요하다. 의약품 심사 때 요구하는 서류의 양이 너무 많고, 시간도 선진국에 비해 두배 이상 걸린다.

▶박 = 우리나라도 국제 수준에 걸맞은 임상시험 시설과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할 필요가 있다. 다국적기업들은 의약품 심사과정을 개선하기 위해 심사청구비(식품의약품안전청에 의약품 심사를 청구할 때 기업이 내는 비용. 국내에선 인지대 6만원만 내면 되지만 미국의 경우 수억원이 든다)를 낼 의사도 있다. 국내 제약산업 인프라를 선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 = 미국은 식의약청 인력의 약 40%가 의사다. 일본이나 대만도 의사를 심사 전문인력으로 고용하고 있다. 한국 식의약청에는 의사가 한명도 없다. 심사청구비를 기업에서 받아 그 돈으로 의사를 고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식의약청의 재정과 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리 = 의약품에 대한 광고제한을 풀어야 한다. 의약분업 이전엔 광고를 보고 약물을 오남용할까봐 제한했지만 이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대신 환자들이 광고를 통해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 = 전세계적으로 지놈(genome)에 관한 연구가 한창이다. 지놈 연구가 의약품 개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하는가.

▶켈리 = 현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 가능성이 검토되고 있다. 어떤 분야에서 얼마만큼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성이 시험되고 있는 e-비즈니스의 현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1~2년 안에는 중점 분야가 보다 좁혀질 것이다.

▶리 = 전문가들은 10~15년 안에 유전자(DNA) 구조에 따라 개인별로 맞춘 '맞춤 의약품(designer drug)' 이 나오리라고 본다. 우리는 혁명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은 DNA의 순서에 대해서만 파악한 상태지만 이들이 생물학.화학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면 의약기술의 발전은 무궁할 것이다.

정리 = 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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