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 머리 돌려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머리카락을 자른 사람이나 잘린 사람이나 미안해하고 민망해하면서도, 그래도 같이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내 딸 연아야, 네가 잘해 주었기 때문이란다.

살아생전에 뉴스라면 엄기영 앵커의 MBC만을 고집하고, 종로에 있는 엄한의원에 가서만 보약을 지어 오셨던 엄마. ‘엄씨는 다 같은 친척’이라서 그런단다. 그땐 웃었지만 넓게 생각하니 맞는 말이다. 큰 경기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은 다 한 핏줄이 되지 않더냐. 네덜란드 선수보다 한 바퀴나 더 빨리 돌아 우리들의 어깨에 힘을 줬던 이승훈은 내 아들이고, ‘예뻐 죽겠다’는 해설자의 말대로 죽을 만큼 예쁜 김연아는 내 딸이다.

머리를 이 모양으로 해놓고선 내뱉는 원장님의 말. ‘머리카락은 곧 자라지만 연아가 이번 경기에 실수하면 돌이키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내 머리랑 연아랑 뭔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연아의 경기가 조금만 더 길었거나, 행여 아사다 마오에게 뒤졌더라면 가발까지 장만해야 했었을 것이다.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세종시 문제. 어쩌겠다는 건지, 어쩌라는 건지… 그들의 짓거리가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악영향도 주지 않나 보다. 정치판이 그토록 개판인데도 불구하고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말이다. ‘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개 무시’하는 게 확실하다.

땅속을 아무리 파보아도 돈 될 거 하나 안 나오고, 변변히 물려받은 거 없는 이 작은 땅. 1970년대 외국 갔을 때는 코리아 하면 너도나도 ‘6·25전쟁’ 얘기하며 아는 척을 해 대더니만, 요즘은 그 옛날 일본을 대하듯이 부자 나라로 대우해 주더라. 젓가락으로 스시를 먹을 줄 아는 것만으로도 하이 클래스라도 된 양 폼 잡던 외국인들. 너희들 올림픽 보고 눈치 좀 챘냐? 이제 ‘스시 대신 김치’다.

연아가 안겨준 흥분이 점점 희미해져 가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씩 부아가 치민다. 5월쯤 되어야 머리 모양이 잡힐 듯하니, 올림픽 흥분이 완전히 가신 4월은 내게 매우 잔인한 달이 될 것 같다. ‘내 머리 돌려줘!’ 참 간사하다 사람 마음.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