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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일기] 외교 수장의 '가벼운 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은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교섭과정에서 우리에게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추진에 찬성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 장관이 연설자로 초청된 한국언론재단 주최 고위정책포럼이 열린 23일 오전 7시30분 한국프레스센터. 李장관의 발언을 취재하던 기자와 참석자들은 뜻밖의 이런 언급에 술렁거렸다.

그의 발언은 'NMD와 관련해 미국측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지 표명 요청을 받은 바 없다' 고 밝혀온 정부의 입장과 정면 배치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李장관은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측 요구에)우리가 동의하지 않자 백악관이 추후 브리핑에서 'NMD와 관련해 한국에 지지요청을 하지 않았다' 고 밝힌 것" 이라고까지 말했다.

내친김에 보따리를 다 풀어버리겠다는 듯 李장관은 한.러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미묘하고 민감한 교섭과정을 털어놓았다.

李장관의 언급은 모두가 국익과 관련된 극비(極□) 외교 현안이었지만 잠깐 새에 줄줄이 다 새버린 것이다.

파장이 번질 조짐을 보이자 화급히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수습에 나섰지만 장관의 말을 주워담지는 못했다. "NMD 관련 언급은 장관의 설명이 잘못된 것이다.

또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러시아 쪽 얘기는 정상회담 관련 배경설명이니까 언론이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 거의 사정조였다.

정부 당국자는 "국가이익을 내세워 언론에 보도자제를 빈번히 요청해 온 외교부의 수장(首長)이 거침없이 민감한 외교비밀을 토해내는 상황을 누가 이해해 줄지 모르겠다" 며 어이없어 했다.

물론 NMD 혼선과 한.미간 대북정책 이견조짐 등으로 골치를 앓아온 李장관은 '한.미, 한.러 정상회담에서 우리 입장을 분명히 견지했다' 는 차원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교관례까지 깨버리고 정상회담 막후 조율내용까지 줄줄이 털어놓는 것은 우리 외교의 사령탑으로선 판단착오라는 게 외교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외교부 장관의 '성급한 발언' 으로 미국.러시아 등 우리 국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들로부터 또다른 '불신' 을 당할까 안타까울 뿐이다.

이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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