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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국경제사와 '정주영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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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고(故)정주영(鄭周永)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애는 한국경제의 변천과정과 궤적을 같이한다. "변화에 적응 못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적응하는 사람은 성장한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정부의 정책방향에 적극적으로 적응함으로써 현대그룹을 세계적인 거대 기업군으로 일궈낸 걸출한 기업가였다. 개발독재 시대의 '하면 된다' 는 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기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90년대 이후 시장주도 경제와 정보화 사회의 도래라는 큰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현대그룹에 오늘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 70년대가 절정기〓鄭회장의 성공 하이라이트는 정부가 60년대 후반부터 조선 등 7개 공업을 육성하고 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할 때였다. 당시 정부는 2차와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집중 육성산업을 선정,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삼성과 LG(당시 럭키) 등 역사가 오랜 재벌그룹들은 주춤했다. 아무리 정부가 돈과 조세감면 등 각종 지원을 한다지만 워낙 투자규모가 큰 만큼 실패할 경우의 후유증이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鄭회장은 과감히 치고 나왔다. 미쓰이.미쓰비시 등 일본 구(舊)재벌에 눌리던 일본질소와 닛산 등 신흥재벌이 3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적극 참여하면서 구재벌을 따라잡았듯, 현대와 대우도 중화학공업 정책에 적극 뛰어들면서 70년대 후반께엔 삼성과 LG를 추월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중동건설 붐도 현대를 고속성장시켰다. 현대가 주도한 중동건설 붐은 70년대 초반 오일 쇼크로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우리 경제를 소생시켰다.

당시 현대그룹은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주체못할 지경이었다. 鄭회장은 이 돈으로 현대종합상사.인천제철 등 수많은 기업을 신설.인수하면서 덩치를 크게 키웠다.

어려움도 많았다. 중화학공업과 해외건설은 통제불가능한 외부변수가 많은 데다 투자규모가 엄청나 그룹 전체가 날아갈 위험도 상당했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조선소 건설 당시 영국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5백원짜리 지폐의 거북선 사진을 보여준 것이라든지, 20세기 최대의 공사라던 주베일 산업항 건설 당시 바지선에 재킷을 실어 예인선으로 현장까지 운반해 건설비용을 크게 줄인 것 등 '창조적 기업가' 로서 鄭회장의 일화도 이 시기에 집중됐다.

이 무렵이 鄭회장의 절정기였다. 이때 진출한 자동차와 조선.기계 등 국제적 경쟁이 치열한 중후장대산업을 국민경제의 주력산업으로 키워놓음으로써 그는 한국경제를 한단계 도약시킨 걸출한 기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아무리 정부가 한정된 자원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이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경영한 그가 없었다면 이들 기간산업이 제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50년대에도 그는 변화의 물결을 탔다.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와 원조물자의 배정 등 재벌체제를 태동시킨 정부의 정책적 혜택은 받지 못했지만, 전후 복구 건설과 미군 공사붐을 겨냥, 주력업종을 자동차 서비스에서 건설로 바꿔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 경제 변화가 시련 불러〓鄭회장은 이렇게 경영환경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지만 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 시장주도 경제와 정보화 사회의 도래라는 큰 변화에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80년대는 재벌체제가 그런 대로 정립하고, 국민경제가 고도성장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접어든 시기였는데 鄭회장은 그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반도체는 삼성, 석유화학은 LG와 대림 등 막강한 경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鄭회장은 현대전자와 석유화학을 설립, 반도체와 유화산업에 진출했다가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물론 이 무렵 석유화학 및 자동차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삼성 등 다른 재벌도 80년대 이후의 변화를 못읽었지만 현대의 경우엔 특히 뼈저린 좌절이었다.

또 鄭회장은 80년대 후반 정치.경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버렸어야 할 '정경유착' 이라는 개발독재시대의 산물을 버리지 못했다. 92년 대통령 선거 출마는 자신뿐 아니라 재계 전체에 큰 부담을 주었다.

97년 경제위기의 도래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할 상황에서 鄭회장은 반도체와 투자신탁, 정유업의 덩치를 더욱 키웠다. 언제 물러나야 할지, 그리고 누구에게 물려줘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후계구도의 미확정 상태를 오랫동안 가져간 것도 패착이었다.

김기원(한국방송대)교수는 "바로 그것이 지난해 '왕자의 난' 을 촉발시킨, 그럼으로써 오늘날의 현대그룹 사태를 초래한 마지막 쐐기였다" 고 말한다. 이제 鄭전명예회장이 고인이 됨으로써 창업자의 시대는 끝났다. 일본 마쓰시타전기의 창업자였던 마쓰시타 고노스케처럼 주식은 없다고 해도 창업자라는 프리미엄과 카리스마로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가운데 산업사회는 지나고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로 급변하고 있다. 鄭전명예회장의 무한한 벤처정신은 그대로 승계하면서 무한경쟁과 속도경영에 걸맞은 기업체제를 갖추는 것이 그의 사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김영욱 전문위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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