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전회장 잃은 현대 앞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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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주영(鄭周永)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별세 이후 최대의 관심사는 역시 그가 창업한 현대그룹의 앞날이다.

현대는 鄭전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그룹 분할 과정에서 후계자로 지목된 정몽헌(鄭夢憲.MH로 약칭)회장을 중심으로 고인의 뜻을 잇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鄭전명예회장의 타계가 이미 진행 중인 2세들간의 분가 체제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험난한 앞길을 예고하는 징후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자금난을 시급히 해결해야 하며, 위기에 빠진 대북사업도 풀어야 할 과제다.

MH는 고비 때마다 鄭전명예회장의 후광으로 난관을 극복한 것으로 재계는 평가하고 있다. 鄭전명예회장의 사망으로 MH는 이제 홀로서기의 시험무대에 선 셈이다.

지난해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해 계열 분리됐거나 분리 예정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정몽준 의원(현대중공업 고문)의 계열사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입장이다.

◇ 엇갈리는 명암〓정몽헌 회장이 이끌고 있는 현대는 鄭전명예회장이 생존했던 지난해만도 36개 계열사를 거느린 국내 최대 그룹이었다.

그러나 몽구.몽헌 등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계열 분리가 가속돼 사실상 23개사를 거느린 자산총액 24조2천억원의 재계 5위 그룹으로 전락했다. 지난해 8월 정몽구 회장 계열의 자동차 소그룹 10개사가 분리된 데다 정몽준 고문의 중공업 3개사도 올해 말까지 계열 분리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MH는 현재 난제(難題)가 쌓여 있는 계열사들만 떠안게 되는 셈이다. 모기업인 현대건설은 현재 사실상 2조원 규모의 자본잠식 상태에 직면해 최악의 경우 출자전환 에까지 직면하게 됐다. 지난 5일 이미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에 출자 전환 동의서를 제출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탄탄한 것으로 알려졌던 현대상선도 최근 금강산 관광사업의 막대한 적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MH의 주력사업이던 현대전자와 현대증권.현대투신증권.현대투신운용 등 3개 금융그룹은 자금난으로 자구계획 중이거나 해외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그룹에서 독립했거나 분리 예정인 현대.기아차는 자산 35조7천억원으로 재계 4위를 기록하고, 현대중공업은 12조원으로 9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현대자동차 그룹은 지난해 계열 분리 이후 정몽구 회장 체제 구축에 성공해 탄탄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鄭전명예회장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 경영에 막힘이 없게 됐다는 설명이다.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로 부상한 현대중공업도 지난해 기준 매출 6조6천억원, 순익 1백51억원에 이르는 탄탄한 기업이다.

◇ 구심력 약화 불가피〓분가 이후 형제간에 어떤 형태의 관계가 형성될지도 관심거리다. 현대 내부에서는 지난해 말 정몽구.몽헌 형제간 화해를 계기로 경영은 별개지만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MH그룹과 정몽구 회장의 현대.기아자동차 그룹,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 등이 주력 분야는 다르지만 구매.판매 등에서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면 나름대로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종합상사 등은 이런 관계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현대자동차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MH그룹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아예 종합상사를 새로 설립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같은 그룹 내의 현대전자가 하이닉스반도체로, 친족 계열사인 현대산업개발이 최근 아이파크로 사명을 바꾼 점도 현대가 이미 과거와 같은 구심력을 잃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더욱이 MH 계열의 자구노력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鄭전명예회장 형제들간의 '제 갈길 가기' 는 가속화할 전망이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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