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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경찰 헛발질, 국회 무책임에 희생된 소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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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이다. 부산에서 짐승만도 못한 흉악범의 손에 꽃다운 소녀가 무참히 짓밟혔다. 벌써 몇 명째인가. 2006년 용산 초등학생, 2008년 혜진·예슬양이 목숨을 잃었다. 불과 몇 달 전엔 여덟 살짜리가 등굣길에 끔찍한 성폭행을 당해 평생 갈 장애를 입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분노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던 어른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이번엔 집에 고이 있던 아이까지 납치,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인가.

부산 이모양 사건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범죄라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범인 김길태는 잇따른 성범죄로 수감됐다 출소한 뒤 최근 이양 집 인근에서 또 성폭행을 저질러 수배된 상태였다. ‘전자발찌법’ 시행(2008년 9월) 이전에 범행을 한 전과자라 관리가 안 됐다는 건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경찰이 손을 놓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1차 범행 장소 지척에서 더 끔찍한 범행이 버젓이 자행됐단 말인가. 재범이 예상되는 성범죄자를 아무런 감시 없이 나다니게 했으니 움직이는 흉기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경찰이 실종 신고를 접하고도 단순 가출로 보고 미적거린 것 역시 어처구니없다. 눈 나쁜 아이가 가출하며 안경도 챙기지 않았단 말인가. 뒤늦게 수색에 나선 것도 모자라 다 잡은 범인을 놓치고, 코앞에 있던 시신을 실종 11일 만에야 찾아내는 등 일련의 헛발질에 대해 경찰은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하루 빨리 범인부터 체포해 죄값을 치르게 하라.

이번에도 재차 확인했듯 성범죄는 재범율(再犯率)이 그 어느 범죄보다 높다. 모두 종신형에 처할 순 없으니 전과자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책은 전자발찌다. 국내에서 법 시행 후 전자발찌를 찬 채 재범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김길태처럼 법률의 소급 적용이 불가능한 경우 전자발찌에 버금가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맘 놓고 딸을 키울 수 있겠나. 출소 후 당국이 일대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산과 인력 소요가 만만치 않겠지만 아이들을 지키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다.

정치권도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현행 법으론 전자발찌 부착 기간이 최장 10년에 불과하고, 이동 경로만 확인할 뿐 초등학교 근처를 배회해도 경고·제재할 방도가 없다. 기간을 대폭 늘리고 밀착 감독을 가능케 하는 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에 제출됐지만 여태 통과가 안 됐다. 아동 성범죄 피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도 발이 묶여 있긴 매한가지다. 정쟁(政爭)에 푹 빠져 아동 보호에 꼭 필요한 법 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게 우리 국회의 부끄러운 현주소다.

지난해 7월 미국 텍사스에선 10대 소녀 세 명을 성폭행한 범인에게 4060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어린이 성범죄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미국 사회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조치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런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언제까지 귀한 아이들을 희생시키고 자책만 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