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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나] 삶의 의미 일깨워준 릴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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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1면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가장 좋아하던 책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였다.

정음사 판본으로 읽은 그 책은 지금은 그 어둡고 사색적인 분위기만 오래 전 꿈처럼 남아있지만,빨간 줄을 치면서 되읽었던 그 문장들 하나 하나가 마치 내 무거운 스무 살의 독백인 듯 낯익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사랑하는 이유의 하나는 그 책 속에서 자신을 닮은 무언가를 만나기 때문인지 모른다.

순 서울내기인 내가 서른이 넘어 사랑한 책은 무라카미 하루끼의 『일각수의 꿈』(원제: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이다.

이중 무라카미의 책은 일상에 닳아져 가는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닌,내 생각엔 하루끼 최고의 역작이 아닌가 한다.현대판 카프카를 생각나게 하는 그 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현실인 동시에 꿈이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기괴한 일에 휘말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꿈같은 현실,현실 같은 꿈,그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긴 여행이다.

정말 우리들의 길지 않은 삶은 일장춘몽이며,대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희미한 꿈들이 우리의 일상이다.점점 더 산다는 일이 시시한 꿈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행복했다.

반면 쿤데라의 소설들은 첫눈에 왠지 산만한 듯 느껴지지만,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읽으면 삶에 관한 풍요로운 정의들로 가득 찬 시적이며 철학적인 인생 백과 사전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사랑하는 책들은 유효기간이 적힌 통조림 같은 것이 아니라,세월이 변해도 늘 새롭게 읽혀지는 산삼 같은 책들이다.그 중의 하나가 이미 책이 세상에 나온 지 십 여 년이 넘은 뒤에 읽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문학과 지성사)이다.

어쩌면 이 책은 산다는 게 ‘마른 늪에서 고기를 낚는 일’이라는 걸 알기 시작하는 마흔 살에 읽어서 더욱 좋은 책일 지 모른다.

뉴욕에서 혼자 지냈던 십 여 년이 이 책 속의 사십일 동안의 꿈으로 느껴지면서 나는 문득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다.

삶이라는 고통의 축제가 촘촘히 수놓아진 이 소설을 마치 점자책을 읽듯 만지면서 읽은 기분이다.동시에 내 안으로 열리는 어떤 그림들이 바로 어제 본 듯 생생하다.

황주리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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