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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돈 빌려줘 한 배에 탄 독일프랑스가 더 고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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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06면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오른쪽)와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5일 독일 베를린에서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메르켈은 그리스 지원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블룸버그 뉴스]

그리스가 한 고비를 넘겼다. 지난주 목요일인 4일 영국 런던에서 50억 유로를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금리가 연 6.3%인 10년 만기 채권을 발행한 것이다. 이 돈은 5년 만기 채권을 상환하는 데 쓰인다. 하루 뒤인 5일에는 복지예산 추가 긴축안이 그리스 의회를 통과했다. 연금 등 올해 예산 48억 유로가 깎였다. 그 순간 글로벌 시장에서 소동이 일었다. ‘금융시장의 하이에나’인 헤지펀드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리스 국채에 대한 공매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스가 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보유하지 않은 그리스 국채를 팔아치웠다. 국채 값이 떨어지면 사들여 건네주고 차익을 챙기는 전략이다.

‘연환계 함정’에 빠진 유로존 경제

그날(5일) 오후 6시 독일 베를린에서 정치 이벤트가 열렸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회담이다. 앞서 양쪽은 상대를 향해 칼을 내보이며 위력을 과시했다. 메르켈 쪽은 “그리스가 외채를 갚을 자신이 없으면 섬이라도 팔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리스인들의 굴욕감을 자극했다. 파판드레우 쪽은 “(추가 긴축안을 발표한 뒤) 최악의 경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로사용권(유로존)의 맹주를 자처하는 독일은 IMF 지원은 불가하다는 쪽이다. 독일의 자존심을 슬쩍 건들며 배수진을 친 셈이다.

독일 립서비스 위력은?
두 사람의 회담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그리스 국채 발행 성공과 추가 긴축안의 의회 통과 때문이다. 구체적인 지원책 등이 나올 듯했다. 하지만 회담 뒤 기자회견장에 선 두 사람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들은 그리스 국채를 투기하는 헤지펀드 등에 비난을 퍼부었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가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그리스를 도울 자세가 돼 있다”고만 말했다. 시장이 예상한 200억~250억 유로 지원 패키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영국 런던시장의 전문가들은 “두 사람은 그리스의 추가 긴축과 국채 발행 성공에 고무됐다”며 “메르켈은 ‘후광효과’만으로도 그리스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든든한 독일이 그리스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시그널만으로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다. 성공 여부는 그리스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 달려 있다.

파판드레우 정부는 올해 안에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12.7%에서 8.7%로 줄여야 한다. 내년에는 유로존 기준치인 3%대까지 낮춰야 한다. 매달 긴축 성공 여부를 유럽연합(EU)에 보고할 수밖에 없다.

긴축은 단순히 복지 후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경제가 위축된 시기에 정부 재정지출 삭감은 곧 경제 침체, 일자리 감소를 뜻한다. 그리스인들이 이런 희생을 어느 정도 참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그리스 의회가 추가 긴축안을 통과시킨 5일 고대 민주주의 고향인 아테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공무원, 교사, 일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을 무시하기 힘들다. 지난해 시위로 정권을 바꿔놓았다. 승리감을 맛본 셈이다. 이번 주부터 줄줄이 파업과 시위를 예고해 놓고 있다. 여차하면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좌파 정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

올해 540억 유로 갚아야
그리스가 외채를 갚아야 하는 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찾아오는 끼니 때만큼이나 부담스럽다. 올해 안에 원금과 이자 540억 유로(83조7000억원)를 되돌려줘야 한다. 부채 상환을 위해 그리스가 발행한 국채는 민간 부문의 투자를 위축시킬 게 뻔하다(구축효과). 기업들이 쓸 자금이 외채 갚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지고 그리스인들의 불만은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돈이 필요한 곳은 그리스만이 아니다. 씨티그룹은 최근 글로벌 시장 보고서에서 “유로 표시 채권시장에서 올해 안에 만기가 돌아와 갚아야 하는 채권이 무려 1조 유로에 달한다”고 밝혔다. 금융위기로 여전히 불안한 시장에서 유한한 자금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올 4~5월은 잔인한 봄이 될 듯하다. 두 달 사이에 200억 유로가 넘는 돈을 마련해 빚을 갚아야 한다. 4월에 107억, 5월에 118억 유로어치 채권의 만기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독일의 후광에만 의지해 파고를 타고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올 4~5월 글로벌 시장에서는 ‘그리스 불안’이 다시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작은 핑계만 있어도 헤지펀드들이 떼지어 먹잇감을 공격하는 늑대들(울프팩)처럼 그리스 채권을 투매할 수도 있다. 이미 거대한 무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헤지펀드 관계자들이 최근 뉴욕 한 호텔에서 ‘아이디어 만찬’이란 명목으로 회동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 채권과 유로화 매도 전략을 두고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고 한다.

‘그리스발 도미노 효과’
현재 그리스 위기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국가부도사태의 초기다. ‘경제침체·재정위기→채무 불이행(디폴트) 선언→채무 구조조정 협상→사후 정산’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의 출발점에 그리스가 서 있는 셈이다. 자구 노력과 국제 공조 등으로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도 있다. 반대로 파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독일·프랑스 정부는 국내 반발과 유럽 금융 시스템 유지라는 두 가지 사이에서 절묘한 조합을 찾아내야 그리스를 지원할 수 있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 사람들은 그리스 지원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는 메르켈 등 서유럽 정치 리더들에겐 상당한 부담이다.

독일과 프랑스 금융회사들은 그리스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줬다. 각각 390억 유로와 730억 유로에 이른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사태는 순식간에 스페인으로 전염될 수 있다. 그리스발 도미노 효과다.

스페인 경제가 유로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6%에 달한다. 그리스(2.6%)보다 네 배 이상 크다. 스페인의 부채 규모는 5700억 유로에 이른다. 이 가운데 57%를 독일과 프랑스 금융회사들이 공급했다. 유로존 금융시스템이 그리스·스페인을 중심으로 연환계(連環計)로 묶여 있는 모습이다. 한 곳에 불이 붙으면 삽시간에 전체로 번질 수 있는 구조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위기가 얼마나 빨리 전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전문가들이 독일과 프랑스가 그리스 구제에 나설 것으로 보는 이유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2월 초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프랑스의 그리스 구제 가능성은 70% 정도로 추정됐다.

그런데 최근 그리스가 채권자들과 사전 협의한 뒤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사전에 짜놓은 방식에 따라 그리스 경착륙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자국 내 반발 때문에 지원하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로화 가치는 어떻게 될까.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독일 등이 그리스를 구제한다고 하더라도 유로화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어떤 해결책이든 유로존 재정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도 재정적자 기준치인 3%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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