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운영 칼럼] '합의 불가' 를 합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소작인이 빚을 못 갚자 그의 딸한테 흑심을 품고 있던 지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내기를 걸었다. "이 통에는 흰 돌과 검은 돌이 하나씩 들어 있다. 네가 손을 넣어 흰 돌을 집으면 빚을 탕감하고, 검은 돌을 집으면 딸을 나에게 보내는 것이다. 응하지 않겠다면 너희를 가두는 수밖에 없다. " 통 안에 검은 돌만 들었을 것은 뻔한 노릇이지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따지고 덤비랴?

상전 능멸 죄로 치도곤을 내리기 십상이지, 통을 열어 보일 양심이 있다면 그런 내기를 걸었을까.

*** 민족 이익이 걸린 NMD

역시 묘수는 없었고, 기껏 '합의 불가' 를 합의했을(agree to disagree) 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모범생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까지 김대중(金大中) 외교의 후광은 내치의 불만을 누를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은 진땀나는 대좌였으리라. 누가 뭐래도 남북 관계의 진전은 金대통령의 최대 업적인데, 그 '햇볕' 이 그만 역풍을 만난 것이다. 먼저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이때 미국 행정부가 바뀌었으니 말이다. 민주당의 국가미사일방위(NMD)계획이 공화당의 구상보다 더 물렁물렁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클린턴 재임 중에는 한반도가 지금처럼 궁지로 몰리지는 않았다. 제네바 협정 시비, 경수로 건설 재검토, 재래식 무기 감축 등 북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전방위 '경고 사격' 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 북한이 홧김에(?

) 저지를 실수를 기다리며, 클린턴이 잘못 들인 버릇을 바로잡겠다는 비장감마저 감돈다.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의 유지를 한.러 공동성명에 담은 것은 '결과적으로' 중대한 실책이었다. 충성 서약을 거듭해도 이것저것 꼬투리가 잡히는 판에 한국이 러시아 편에 섰다느니, 미국과의 전통적 유대를 깼다느니 하는 외신 보도는 제풀에 걸린 대어였기 때문이다.

ABM 지지를 NMD 반대로 해석하는 것은 '언론의 자해 행위' 라고 정부는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지만, 솔직히 그것은 한.미 정상회담의 배경 설명처럼 대통령 보좌관들의 '유감 표시' 나 '한국 입장 이해' 따위의 외교 사령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말은 바로 하자. ABM 유지, 그거 옳은 얘기 아닌가?

ABM 제한은 과거 소련과 체결한 협정이므로 현재의 러시아와 무관하다는 미국의 주장은 그야말로 망발이다. NMD 반대, 그것도 옳은 말씀이다. 세계가 반대하는데 미국만 강제한다면, 그건 분명 그들의 잘못이다.

나라의 안전과 생존을 일시의 미봉과 편법으로 덮어서는 안된다. 북한을 깡패 국가로 몰면서 NMD 구축에 동조하느냐, 반미 '괘씸죄' 를 마다 않고 거기 반대하느냐?

어떤 돌을 집어도 희생과 보복은 피할 수 없고, 그래서 남들처럼 '노' 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이 못되는 것이다. 그래 '반민주' 도 살고 '반민족' 도 살지만 '반미국' 은 살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였다.

여기 화두는 단연 민족의 이익이다. 세계화 시대의 민족은 박물관이나 고문서 창고에 밀봉됐기 십상이나 우리한테 민족은 여전히 서러운 생존 조건이다. 당장 NMD 논란만 해도 남북 대립의 틈새에 외세가 매설한 덫에 걸린 것이다. 실로 민족의 이익과 배치되는 남한의 이익 따위는 달리 없으므로 눈앞의 계산으로 민족의 백년 대계에 죄를 짓지 않는 지혜가 요청된다.

*** 화합의 멍석을 먼저 펴야

마침내 돌 하나를 고른 소작인은 얼른 담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지주에게 "온몸이 떨려서 차마 손바닥을 펴지 못했습니다. 이제 통에 남은 돌을 보면 제가 무슨 돌을 집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고 아뢰었다. 이 '썰렁한' 재치 문답이 오늘의 난제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믿어 꺼낸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문제에도 - 그것이 문제인 한 - 해결책은 있다는 선인들의 교훈이 간곡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의 곤경은 현재 남한의 처지보다 훨씬 더 절박했었다. 불바다 위협과 추락 반보 전의 벼랑 끝 모험에서도 그들은 사담 후세인과 달리 경수로 건설을 평화적 협상으로 끌어냈다. 그 험한 생존의 노하우가 정녕 눈물겹지 않은가?

안보정세 변화에 따른 '긴밀 협조' 약속이 혹시 NMD 지지를 겨냥한 암묵적 외교 수사라면, 그것은 언제라도 폭발할 뇌관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대중 정권만의 숙제가 아니고 초당적.범국민적 협력으로 돌파할 과제라면, 안으로 화합의 멍석을 먼저 펴고 그 협력을 구하는 일이야말로 집권자의 지혜며 도리리라.

정운영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