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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f&] 모자 로고, 프로 골퍼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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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이정은·김하늘·지은희·홍란(왼쪽부터)이 모자를 앞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국내 여자선수 몸값 거품 논란 속 US 여자 오픈 챔피언인 지은희는 최경주·양용은 등 다른 정상급 선수들처럼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다.

지난겨울 국내 골프업계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골프 마케팅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기업이 여자골퍼 영입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자 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여자 골프구단을 창단하려다 선수가 없어 포기한 기업들도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프로골퍼들에게 ‘스폰서’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이번 주 golf&은 여자 선수들을 통해 프로골퍼와 스폰서의 함수관계를 들여다봤습니다.

<호주 골드코스트> 글·사진=문승진 기자

인기 많은 여자 골퍼

김하늘(비씨카드)·이정은(호반건설)·홍란(MU스포츠)은 4일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개막한 유럽여자투어 ANZ 레이디스 마스터스에 참가했다. LPGA투어에서 활동하는 지은희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 김하늘·이정은·홍란은 각각 새로운 스폰서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나왔다. 반면 ‘무적’인 지은희는 아무 로고가 없는 흰 모자를 쓰고 나왔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프로 골퍼들에게 모자의 로고는 자신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프로골퍼들에게 스폰서는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스폰서에 대한 로열티를 갖는 건 물론 자긍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김하늘)

아직 스폰서가 없는 지은희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국내의 경우 골프용품사와 의류업체는 물론 유통·건설·금융 등 20여 개 기업이 여자 프로골퍼들을 후원하고 있다. 골프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여자 골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지은희는 “메이저 챔피언인데 스폰서가 없다는 게 자존심 상한다. 현재 협상하고 있는 기업이 서너 곳 된다. 그러나 선수의 요구와 기업의 입장이 맞아야 계약이 성사되기 때문에 선수 입장에선 경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골프는 개인 운동인 만큼 선수들에게 스폰서는 더욱 소중하다. 그래서 일부 선수와 기업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몸값을 부풀려 발표하기도 한다. 홍란은 “일부 골프용품사의 경우 지원 물품을 현금으로 계산해 계약금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선수들도 이해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캐디하는 이유

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은 1년에 투어 경비로 보통 15만~20만 달러(약 1억7000만~2억3000만원)를 쓴다. 여기에 캐디에게 매주 1000달러 정도를 줘야 한다. LPGA투어에서 뛰려면 아무리 적어도 2억~2억5000만원 정도는 경비로 써야 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선수들은 ‘스폰서’가 있어야 경기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만약 스폰서가 없다면 대회 때마다 성적에 신경 써야 한다. 최소한 상금 랭킹 30위 안에는 들어야 적자를 면할 수 있다는 게 선수들의 주장이다.

국내에서 뛰려면 경비는 훨씬 적게 든다. 그렇지만 스폰서가 없으면 경기에 전념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KLPGA투어에서 뛰는 여자 골퍼들의 경우 1년 투어 경비로 5000만~6000만원 정도를 쓴다. 캐디 비용은 대회당(3라운드 기준) 50만원 정도. 1년에 20개 대회라고 가정하면 캐디피만도 1000만원이나 된다. 선수 아버지가 직접 가방을 메는 건 전문 캐디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캐디를 맡고 있는 김하늘은 “지난해의 경우 상금랭킹 30위(5600만원) 이내에 들어야 간신히 투어 경비를 벌 수 있었다. 일부 상위 랭커를 빼고는 스폰서가 없다면 레슨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자골퍼들이 후원사로부터 받는 돈은 얼마나 될까. 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국내 톱 클래스 선수들의 후원금액은 대략 1년에 1억5000만~2억원 수준이다. ‘골프 지존’ 신지애는 예외적인 경우다. 신지애는 후원사인 미래에셋으로부터 인센티브를 포함해 1년에 많게는 15억원을 받는다.

한국 스폰서의 명암

여자 골퍼들을 후원하는 국내 기업의 경우 선수들에게 계약금 외에도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물심양면의 지원이다. 지은희는 “요즘은 외국 선수들도 한국 기업과 계약하고 싶어 한다. 워낙 지원을 잘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 기업의 경우엔 소속 선수의 생일에 파티를 열어주고 간식거리까지 챙겨준다. 계약금 외에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도 짭짤하다. ‘인센티브’란 성적에 따라 선수에게 주는 일종의 상여금이다. 선수들은 우승하면 상금의 50%, 톱5 안에 들면 30%, 톱10 진입 시 20%를 후원기업으로부터 별도로 받는다. 성적만 좋으면 계약금보다 더 많은 보너스를 챙길 수도 있다. 선수들이 스폰서를 간절히 원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러나 한국 특유의 ‘정 문화’가 선수들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성적 부진이나 부상 등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면 하루아침에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계약서에 정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선수와 스폰서의 관계를 비즈니스 차원으로 생각한다. 계약서 내용만 A4용지로 수백 장에 달한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처리하는 곳이 많다. 홍란은 “어떤 스폰서의 경우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는 경우도 있다. 또 조금만 성적이 부진해도 선수들을 압박하고 사생활까지 간섭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의 경우 대회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행사 및 이벤트에 참여하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곳도 있다. 이정은은 “골프는 리듬의 스포츠다. 선수들은 대회 일정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한다. 어떤 스폰서의 경우 하루 정도 행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곳도 있는데 선수들의 입장에선 절대로 그렇지 않다. 특히 일방적인 지시가 떨어지면 선수들이 더 힘들어 한다”고 말했다.

몸값 거품 논란

국내 여자 골퍼들은 신인의 경우 계약금으로 평균 2000만~3000만원 정도를 받는다. 우승 경력이 있으면 5000만원 이상을 받는다. 국내 톱 프로들의 경우 몸값이 2억원(인센티브는 별도) 정도다. 하지만 일부 선수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내 한 기업 관계자는 “이름이 조금만 알려지면 억대를 요구한다. 어떤 신인 선수의 경우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견 프로와 똑같은 대우를 요구해 결국 계약하지 못했다. 인센티브 등을 포함하면 국내 선수들의 몸값이 너무 비싸다”며 거품론을 제기했다.

선수들은 이 주장에 일부는 수긍하면서도 불확실한 미래와 스폰서의 성적 지상주의가 몸값 상승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지은희는 “외국의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장기적으로 후원하는 기업이 많다. 선수들도 단기간에 고액을 받기보다는 안정적으로 투어에 전념할 수 있는 장기 계약을 원한다”고 말했다.

외모 가꾸기도 자기 관리

기업들이 여자 골프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홍보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신지애·서희경·유소연 등 걸출한 스타들의 탄생은 여자 골프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여기에 치열한 경쟁 구도를 통해 여자 골퍼들의 기량이 향상되면서 여자 골퍼를 앞세운 마케팅이 더욱 활성화됐다.

김하늘은 “여자 선수들은 연습도 열심히 하지만 외모를 가꾸는 등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피나는 노력이 결국 대회 수 증가와 인기 상승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홍란은 “여자 프로골퍼들이 남자 아마추어와 같은 티잉 그라운드에서 플레이하고, 드라이브샷 거리도 비슷하기 때문에 남자보다는 여자 프로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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