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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목숨 걸고 고향 지켰는데 양민학살했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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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강화특공대 전우회원들이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를 찾아가 명예 회복을 다짐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최승범·이희석·이석범·조기수·홍영희·홍순주·이계용. 앞줄 왼쪽에서부터 이동호·신재은·김범수·안득규 대원. [정기환 기자]

2일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의 한 야산 중턱. 백발의 팔순 노인 10여 명이 힘겹게 산을 올라 한 초라한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기단도 없이 군데군데 모서리가 깨어져 나간 이 작은 비석은 뒷면에 22명의 전사자 명단을 담은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다. 산에 오른 이들은 강화향토방위특공대 전우회원으로 60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번도 없이 고향 강화 섬을 사수한 역전의 노병들이었다. 이계용(86·강화읍) 전우회장은 “적의 침략에 맞서 목숨 걸고 고향을 지켜냈던 이들을 ‘양민 학살자’로 매도하는 세태가 너무 기막혀 먼저 간 전우들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산에 오르기 전 강화읍내의 한 식당에서 46명의 전우가 참가한 가운데 정기총회를 열고 3통의 청원서에 연대 서명을 했다. 인천시장과 강화군수에게 보낸 청원서는 『신편 강화사』의 왜곡된 내용을 바로잡아 주고 버려지다시피 된 특공대 불망비를 원상 복구해 달라는 내용이다. 나머지 한 통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대해 ‘강화특공대가 430여 명의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다’는 결정(2008.7.17)의 증거자료를 공개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의 후퇴가 거듭되던 1950년 12월 18일 조직됐다. 강화 섬을 지키던 유엔군 소속 터키군과 경찰의 철수가 임박하자 24명의 청년이 피란 대신 ‘고향 강화 사수’를 결의했다. 9·28 수복 후 강화치안대장을 지냈던 최중석(2008년 작고)씨를 대장으로 전투가 한창일 때는 500여 명의 병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들은 철수한 경찰의 총으로 무장하고 51년 3월 16일 해산하기까지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이면서 강화도를 지켜냈다. 1·4후퇴 이후 평택·안성까지 전선이 밀렸음에도 강화도는 적이 감히 건너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첫 전투는 51년 1월 8일 돌머루에서 벌어졌다. 대원들은 바다 넘어 개풍군에서 80여 명의 내무서원과 강화 출신 공산당원 300여 명이 배를 타고 강화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돌머루 선착장에 매복했다. 오전 2시쯤 적들이 배를 타고 섬에 접근하자 선공에 나서 인민군과 내무서원 등 289명을 생포했다.

1월 18일에는 가장 치열했던 ‘당산 전투’가 벌어졌다. 김포해안으로부터 상륙해 오는 인민군 2개 중대와 맞붙었으나 박격포와 중기관포 등의 화력에 밀려 이용석·용달 형제대원 등 17명이 전사하고 석모도로 후퇴해야 했다. 석모도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1월 30일에는 강화읍을 재탈환했다.

모두 22명의 대원이 전사한 이들 전투는 『한국전쟁과 유격전』(육군본부 군사연구실·94년) 대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이 같은 전공을 기려 강화군은 52년 강화읍내 대로변에 3개의 기단을 갖춘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를 세웠다. 또 특공대의 전적은 3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향토사 『강화사』에 상술됐다.

그런데도 2003년 강화문화원이 펴낸 『신편 강화사』에는 강화특공대의 양민 학살 의혹이 13쪽에 걸쳐 독립된 장으로 실려 있었다. 현대사 제3장 ‘강화의 수난과 민간인 학살’에는 공공연히 강화특공대를 가해자로 지목했다. 90년 후반부터는 양민 학살 진실규명 목소리가 강화도 내외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유족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2007년 들어서는 생존 대원이 하나 둘씩 진실화해위원회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병든 몸으로 조사를 받았던 최중석 대장은 조사실을 나와서는 “피를 토할 노릇”이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강화특공대원들은 현재 강화도 거주 60여 명을 포함, 100여 명이 생존해 있다. 이들은 “갈 날이 머지않은 나이에 훈장을 바라지는 않는다”며 “그러나 고향 향토지에조차 ‘양민 학살자’로 남아서는 먼저 간 전우들이나 자손들 볼 낯이 없다”며 청원서에 도장을 눌렀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측은 “강화 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받아들여 소정의 조사활동을 거쳐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강화=정기환 기자



이계용 전우회장 “특공대 비석 두 번 쫓겨나 기단도 잃은 채 산에 방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양민 학살 주범이라니요.”

이계용 강화향토방위특공대전우회 회장은 상기된 모습이었다. 역사 평가는 차치하고 사실이 잘못 알려져 역사의 죄인이 됐다는 것이다.

6·25가 난 1950년 그는 강화군 하점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26세 청년이었다. 당시 강화도에서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인민군의 상륙을 막을 특공대가 조직됐다. 이때 이 회장은 단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여기에 자원했다. 해방 후 혼란기 우익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했던 경험도 있었다. 그는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어떤 역할을 했나.

“최중석 대장 밑에서 작전참모 직책을 맡았다. 따라서 갑곶·돌머루 전투 등 강화특공대의 크고 작은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대원들은 점차 늘어갔으나 무기가 없어 많은 대원이 희생돼 가슴이 아프다. 가장 희생이 컸던 당산전투 때도 제대로 무장을 갖춘 대원이 20여 명이 안 됐다.”

-신편 강화사나 진실화해위의 결정에는 (특공대가) 많은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돼 있는데.

“말도 안 된다. 양민을 학살했다는 51년 1월 초에는 강화도로 넘어오려는 적을 막느라 거의 해안에서 지냈다. 오죽 다급했으면 하점면의 중학생들을 모아 소년대까지 조직했겠나. 인민군복 차림으로 강화도에 잠입한 채명신 장군에게도 ‘국군과 합류하면 제발 무기 좀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대원들이 좌익 활동가들에게는 적개심도 있었지 않겠나.

“당시 개성 쪽에서 숨어 들어온 이들 중에는 인민군복 단추를 자루째 짊어진 사람이나 중·고교생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촌사람들이 무슨 사상을 알겠느냐’며 풀어 주곤 했다.”

-특공대 비석이 초라하게 방치돼 있는데.

“도시계획이다 뭐다 하며 두 차례나 끌고 다니다가 기단도 망실된 채 산비탈에 처박아 놓았다. 해마다 6월이면 전우들이 제사를 지내 왔지만 너무하다는 느낌이다. 특공대가 지금까지 받은 것이라고는 육군본부의 종이 표창장 하나뿐이다.”

글,사진=정기환 기자

알려왔습니다  강화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은 2008년 7월 8일 제76차 전원위원회에서 진실이 규명된 사건이라고 알려왔습니다. 위원회는 또 당시 서울지법 인천지원 판결문, 강화경찰서 탄원 사건 수사 결과(2001년 4월) 등을 검토하고 참고인 139명으로부터 진술을 들었다고 전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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