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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칼럼] 좀 떳떳하게 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는 너무 잘 잊고 산다. 여권이 작성했다는 언론장악 문건이 폭로되고 언론사 일제 세무조사가 진행 중인 지금의 상황이 불과 1년반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데도 우리는 당시 상황을 까맣게 잊고 산다.

*** 언론 손보기 뒷소문 무성

1999년 9월 27일이었다. 오후 7시30분쯤, 중앙일보 편집국에는 3백여명의 기자들이 모여 결의를 했다. 중앙일보 홍석현(洪錫炫)사장 수사를 현 정권의 일부세력이 주도한 언론장악 음모라고 보고 '언론장악음모분쇄 비상대책위원회' 를 출범했다.

정권의 모든 압력 분쇄선언, 엄정한 검찰수사 촉구, 정권의 인사.지면간섭 중단요구, 과거의 일부 편파보도에 대한 자체 반성 등을 하고 국세청조사가 인신비방과 부풀리기에 주력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언론과 시민단체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기를 호소했다.

뒤이어 다음달 이른바 '문일현 보고서' 라는 언론장악 문건이 드러났다. 정권 장악을 위해서는 언론개혁을 해야 하고 그 중 중앙일보 세무조사를 통해 다른 언론사를 압박하라는 요지의 건의서를 문일현 전 기자가 여권실세에 전한 내용이었다.

당시 세무조사와 언론문건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국정조사까지 실시했지만 그 결과는 흐지부지됐고 지금껏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앙사태 발생후 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언론연대를 제안했었다. 입술이 망가지면 잇몸이 시리다, 중앙사태는 한 신문사만이 아닌 언론사 전체의 탄압일 수 있으니 연대해 맞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타언론사들의 반응은 너무나 차가웠다.

탄압은 무슨 탄압, 너희가 무슨 탄압을 받았다고 자유언론을 외치느냐는 냉소적 대응이었다. 그때 순망치한론을 압도한 것이 양호유환론(養虎遺患論)이었다. 호랑이를 길러 화를 남기기보다는 나의 적이 호랑이에 먹혀가기를 바란다는 수수방관 자세였다. 언론사간 죽기 살기식 경쟁풍토의 한 단면이었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떤가. 어느 신문사는 크게 당할 것이고 어느 신문사는 지난번에 당했으니 피해가 적을 것이라느니, 어느 사주는 손 볼 것이고 어느 사주는 무사할 것이라느니 뒷소문이 무성하다. 아직도 양호유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누가 먹고 먹히는 싸움이냐는 치졸한 수준의 뒷공론밖에 나오질 않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개혁과 세무조사를 정치적 음모라고 단정할 어떤 확실한 증거도 없다. 다만 돌아가는 정황이 당시와 흡사하니 그런 시각에서 사태 추이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언론개혁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개혁의 당위성을 정면으로 반대할 자격과 명분을 갖추고 있느냐는 여론의 항변에 언론사 스스로 경청할 대목이 분명 있다는 점이다. 당시와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언론장악을 위한 정치적 음모라는 아직은 불분명한 시각과 그래도 언론개혁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서 언론사들은 '언론개혁〓정치탄압' 이라고 주장할 만큼 떳떳한지를 깊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 간부들은 추석 때면 일선 신문보급소를 찾아 배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일선 판매현장의 실태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4시만 되면 신문을 돌리기 시작하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열악한 근무환경, 경쟁사간의 피나는 판매전쟁 등을 보고 들으면서 그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을 안은 채 돌아서곤 했다.

*** 스스로 진흙탕서 발빼야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천하대세를 논하는 기자들의 세상과 그들이 제작한 신문판매의 현장과는 너무나 엄청난 괴리감을 느꼈다.

발은 진흙탕에 담은 채 머리와 입만 살아 있다는 공허감이 들기도 했다. 국민과 독자들이 요구하는 언론개혁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과당 판매경쟁, 무한정 무가지 돌리기, 그리고 불투명한 경영… 이런 것들이 거부할 수 없는 언론개혁의 당면과제일 것이다.

순망치한론이 별 게 아니다. 신문이 연대해서 개혁을 선도하자는 것이다. 양호유환론으로 누가 득보고 손해 볼 것이냐는 잔머리를 굴리기 전에 언론사끼리 연대해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하지 말 것인지를 공동으로 선언하고 개혁하는 것이 정치적 음모 자체를 분쇄하는 길이라고 본다.

먼저 스스로 흙탕물에 담긴 발을 빼고 맑고 밝은 언론환경에서 신문을 제작하고 판매한다면 정권의 언론장악음모가 설령 있다한들 한치의 틈새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한 신문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순망치한의 연대가 필요하다. 좀 솔직하게, 좀더 떳떳하게 살기 위해 언론 스스로 개혁에 앞장서자. 그게 권력의 언론장악 유혹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길 아니겠는가.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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