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실력을 발휘해도 될까 말까인데, 컨디션이 최악이었으니….”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을 지휘한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당시에는 A매치 상대를 구하지 못해 클럽팀과 평가전을 치렀다”고 회고했다. [중앙포토]
스페인전에서 35m 프리킥으로 골을 터뜨린 황보관. [중앙포토]
시차 적응에 애를 먹으며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대표팀은 벨기에와 스페인·우루과이에 차례로 무너졌다. 팬들의 비난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각광받았던 김주성에게 쏠렸다. 신문 독자투고란에는 ‘긴 머리를 당장 자르라’는 분노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함량 미달 평가전=89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뒤 대표팀은 14번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중 A매치는 단 네 번. 그나마도 이집트를 제외하면 노르웨이·몰타·이라크 등 월드컵 본선과는 상관 없는 나라들이었다. 이 부회장은 “돈을 싸짊어지고 가도 한국은 상대를 안 해 주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이 높아졌다. 월드컵 본선 직전 세계랭킹 1위 스페인과 평가전을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탈리아 월드컵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이 상대한 팀은 대표팀이 아닌 클럽팀이었다. 대표팀은 90년 5월 9일 싱가포르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아스널과 평가전을 치렀다. 아스널은 막 시즌을 마친 팀이었다. 아스널 관계자는 경기 전 “우리는 관광 겸 비즈니스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평가전이라면 일정이나 상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 경기는 다국적 석유기업이 후원하는 대회였다. 항공료에 출전료까지 받을 수 있어 재정이 풍족하지 못했던 협회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이 부회장은 “새파란 대학생을 뽑으니까 기술위원회 어른들로부터 꾸지람도 들었다. 홍명보는 경험은 없지만 머리가 비상한 선수였다. 기본기도 좋았다. 주저 없이 선발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월드컵 벨기에전이 끝나자 “최순호와 홍명보만 보였다”는 제목이 국내 신문을 장식했다.
이 부회장은 “허정무팀에도 김보경이나 이승렬 등 머리가 좋고 재능이 빛나는 어린 선수가 많다. 하지만 홍명보가 조민국의 부상을 틈타 스타가 됐듯이 실력에 운이 좀 따라야 성공할 수 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장치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