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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 전쟁의 폐허 사랑만이 희망이었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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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 312쪽, 9000원
소설가 박완서(73)씨가 새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을 독자들 앞에 내놓았다. 『아주 오래된 농담』 이후 4년 만이다.

마흔살 늦깎이로 등단해 뒤늦은 출발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줄기차게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온 박씨가 이번 소설에서 꺼내 든 실끈은 색깔로 치자면 연보라빛이다. 『그 남자네 집』은 박씨가 20대에 경험한 첫사랑을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연애소설인 것이다. 박씨는 소설 첫머리 ‘작가의 말’에 “지난 여름 소설을 쓰는 동안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칠순에 연서를 쓰는 일은 기쁨이자 고통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인 내가, 아파트를 버리고 땅 집으로 이사간 후배 집구경을 갔다가 50년 전 첫사랑인 그 남자가 살았던 기와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 퇴락했지만 건재하게 남아 있는 집은 그 남자에 대한 기억으로 나를 이끈다.

6·25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남자와의 사랑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외가쪽 먼 친척으로 동급생이었지만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남자는 서글서글한 미남이었어도 내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 집에 비해 점점 기우는 가세(家勢)는 내 속을 끓였지만 나는 곧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회복했고, 무엇보다 나는 이성교제는 꿈도 못 꾸는 답답한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남자들 이 사라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여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했다. 나의 학업은 당연히 중단된다. 치욕을 무릅쓰고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어느 겨울날 퇴근길 전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발 밑의 언땅은 내게 고무공 같은 탄력을 준다. 미군 장교나 입을 것 같은 날 선 사아지 군복바지에 반짝거리는 구두, 안에 털 달린 파커 차림의 그는 순식간에 놓치고 싶지 않은 ‘웬 떡’으로 격상된 것이다.

그 날 이후 그와 나는 텅 빈 도시 서울의 마지막 남녀가 된다. 종로 거리는 완전히 파괴됐고 주택가는 썰렁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비현실적으로 은성(殷盛)하던 명동 바닥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밀회를 즐긴 것이다. 카바이트 불 밝혀 놓은 삼선교의 포장마차도 단골 데이트 장소였다. 그는 나지막하고 그윽하게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암송해주곤 했다.

그와 나의 사랑은 더 이상 마지막 남녀가 아니게 되면서 전기를 맞는다. 전세가 호전되자 떠났던 사람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주의가 분산되면서 사랑도 초점을 잃는다.

이후 두 사람의 사랑이 최종적으로 깨어지기까지, 박씨가 풀어놓는 우여곡절은, 흔히 박씨 소설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사소설적 절실함’에 걸맞게 절절하다. 그에게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결혼으로 도피한 나의 ‘사랑 이후’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소설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하는 또다른 재미는 박씨 특유의 입심으로 풀어낸 감칠맛 나는 이야기 자락들에 있다. 박씨는 전쟁 직후 동대문 시장의 억척스러운 모습, 베이비 붐 현상 등 수십년 저쪽의 풍경과 세태를 그리기도 하고, 도를 넘어보였던 시어머니의 요리 탐닉도 소개한다.

괴팍스러울만큼 예민한 나의 성정(性情)을 지켜보는 일도 흥미진진하다. 나는 그와 포장마차 주인이 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자 ‘나를 의식하고 꼴값을 떠는구나’하고 생각하고, 훗날 남편이 된 전민호의 집에 인사하러 가서는 당당히 국을 더 청해 먹는다. 아이 넷을 낳고 그 남자를 다시 만나서는 상스러운 욕을 해대며 닦달한다. 모질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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