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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기미년 이른 봄날의 전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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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절,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역임한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기원이다.

도산이 이끌던 신민회가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 후 천도교·불교·기독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은 오랫동안 거족적(擧族的)인 독립시위를 준비해오던 끝에 드디어 거사일을 택일(擇日)하기에 이른다. 기미년 3월 1일, 그 이른 봄날 하루가 달력 속의 크로노스(Chronos)를 박차고 나와 역사의 카이로스(kairos)로 진입하는 위대한 순간이다.

7509명의 사망자와 1만5961명의 부상자를 내면서도 ‘주체의 일원화, 참여의 대중화, 방법의 비폭력화’라는 원칙 아래 전국의 200여만 민중이 오직 평화적 시위로 일관한 3·1항쟁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선명히 떨쳤을 뿐 아니라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독립투쟁 사티아그라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20세기 민족·민중운동의 선구(先驅)’라는 불멸의 이름을 인류 역사에 새겨 넣었다. ‘민족개조론’을 주창하며 뛰어난 웅변으로 겨레의 가슴에 민족혼의 불꽃을 일으킨 도산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라!” 도덕경에 ‘변자불선(辯者不善)’이라 했듯이 말 잘하는 사람일수록 신뢰하기 어렵다지만, 도산은 탁월한 웅변가이면서 또한 진실한 인격자였다.

나라의 멸망도 지도층의 거짓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도산은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다.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니, 내 죽어도 거짓말을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망국의 원인을 일본의 침략 이전에 우리 내부의 거짓에서 찾은 것이다. 영혼이 떨리는 자기성찰이다.

“어떤 나라도 자살 이외의 방법으로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에머슨의 익살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너무도 슬픈 진실이다.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이제 예삿일이 되었다. 블랙홀처럼 모든 국정 현안을 집어삼킨 세종시 논란도 정책 대결의 틀을 벗어나 정파 간의 권력투쟁으로 변질된 느낌이다. 서로를 향해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하지만, 국민들은 싸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진실을 규명하는 법정(法廷)에도 거짓이 넘쳐난다. 매년 2000명 이상이 위증죄로 기소되는데, 인구가 갑절도 넘는 일본은 130명 정도라니 비교 자체가 무색하다. 법정의 거짓말 행진에는 법치(法治)의 일선에 있는 법조인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그뿐인가? 3·1항쟁의 중심이었던 종교계마저도 근본주의·교파주의의 배타적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기복신앙·강단세습·물량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신앙의 진실을 멀리 떠나 있다. 91년 전 이 땅의 교회들은 호화로운 대형 건물이 아니라 불타버린 47개 예배당의 폐허에서 ‘빛과 소금’의 자리를 지켰다. 빛과 소금은 어두운 곳, 썩는 곳을 찾아가 자신을 녹여 사위어감으로써 제 소명을 다하는 법이다.

엄숙하고 사려 깊었던 선인(先人)들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속에서 또 한 번의 3·1절을 맞는다. 국토가 남북으로 나뉜 터에 다시 이념의 좌우로, 지역의 동서로, 소득의 빈부로, 정치의 여야로 갈라서서 끝도 없이 싸우며 미워하는 못난 후손들을 기미년의 선조들은 얼마나 안쓰럽게 여기고 있을까.

서로 다르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다름’은 갈등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의 동인(動因)이다. 보혁(保革)도 서로 갈등만 빚을 일이 아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보수’는 건강하고, 역사와 전통 앞에 예의를 갖출 줄 아는 ‘겸손한 진보’는 매력적이다.

도산은 침략자 일본조차도 망하기보다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하물며 우리 안에서랴. 소통과 화합은 진실의 길이요, 분열과 대립은 거짓의 징표다. 척박한 식민의 동토(凍土)에 피어났던 ‘주체의 화합, 참여의 개방, 방법의 비폭력’이라는 선인들의 지혜가 마치 머나먼 옛적의 전설인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오늘, 도산의 안타까운 호소가 이른 봄바람을 가르며 3·1절의 아침을 찾아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부터 고치는 일을 큰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요, 또 우리 스스로가 속는 사람일 것이외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