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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바꿔야 은행 바뀐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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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34면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의 가장 큰 변화는 저성장 체제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경제성장이 이어지고 있으며,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중국의 고도성장에 그저 놀라워하며 ‘아 옛날이여’만 읊조리는 형편이다. 빚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과거와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빚에 관대하다. 재산(wealth)보다 소득(income)에 의존하는, 이른바 부채 유발형 세대(debt friendly generation)가 등장했다. 이로 인해 소비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확대일로에 있다. 반면 기업 부문의 투자나 고용지표는 부진한 모습이다.

김우진의 캐나다 통신

우리나라 금융산업, 특히 은행산업은 기업 부문의 주체로서 국민경제에 과연 얼마만큼 기여하고 있을까. 한참 잘나가던 2005년, 2006년만 하더라도 순이익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1.8%까지 차지했다. 당시 주요 선진국 은행의 평균이 1% 전후였으니 놀랄 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의 이익 변동성은 지나치게 높다. 많이 벌 때는 한없이 벌 것처럼 보이다가도 안 될 때는 영락없이 바닥에서 헤맨다. 그러니 수익성지표를 가지고 국민경제 기여도를 따지는 일은 위험하다.

고용지표는 어느 정도 트렌드를 가지고 움직이므로 비교하는 데 무리가 없다. 문제는 고용면에서 볼 때도 기여도가 매우 낮다는 점이다. 국내 은행들은 그동안 비용 절감 차원에서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2006년 총인원은 1995년에 비해 33% 이상 줄었다. 성장은 했지만 고용은 없었다.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 자산 대비 종업원 수 또한 해외 주요 은행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글로벌 영업을 주로 하는 HSBC의 인력은 국내 은행산업 전체 인력의 3배를 웃돈다. 이런 해외 은행들은 고비용·고수익 구조를 나타낸다. 종업원을 많이 채용하기 때문에 총 인건비는 대단히 높은 수준이지만 숙달된 전문 인력을 적극 활용하여 높은 수익을 창출한다. 주로 이자 수입보다 수수료 수입을 통해 안정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인력구조의 변화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인력 감축 과정에서 상위 관리직과 행원 인력이 주로 물러나면서, 현재의 인력구조는 중간관리자 층이 비대한 기형적 형태다. 우리나라 금융회사의 IT 기술은 세계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금융기법은 세련되지 못해서 노동집약적이다. 하부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선 업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행원들에게 엄청난 부하가 실릴 수밖에 없고 고객들은 불편해 한다. 부족한 인력을 계약직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이는 그간의 인력 관리가 잘못됐다는 점을 은행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지속 성장하려면 명퇴 등을 통해 중간관리계층을 축소해 나가는 경영 행태에서 탈피해야 한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함으로써 국민경제 기여도를 높여야 한다. 확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노조의 존재와 이에 따른 경직적 고용 형태다. 노조의 입김이 세지면, 한번 직원은 영원한 직원이 된다. 똑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해가 지나면 보상 수준은 높아진다. 이익 증가율이 비용 증가율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그 조직의 경쟁력은 유지되기 어렵다. 아울러 직원을 많이 채용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금융연구원이 제안한 복합직군제 도입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즉, 현재의 단일직군제 대신 직원들을 전문직·판매직·행정직 등으로 다양화해 임금을 차별화하는 방안이다. 예컨대 정년을 보장하면서 승진·보상 등에 제한이 있는 직군과 선진 금융회사의 성과문화와 일치하는 직군으로 인력을 분리하여 운용하는 인사관리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와 같이 사회안전망이 열악한 상황에서 선진시스템 도입은 자칫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만큼 고용의 안정성은 보장하는 방식이 돼야 할 것이다. 이를 전제로 노조의 전향적 자세가 요구된다.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립 없이는 선진국형 인력구조의 정착은 어렵다고 본다.

새로운 성장엔진으로서 금융의 글로벌화가 화두다. 그러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지금과 같은 글로벌화 노력은 과거에도 있었다. 금융회사의 투자 여력이 옛날보다 나아져 베팅하는 규모가 확대된 정도다. 선진국시장의 조그마한 금융회사 하나 인수했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신흥시장의 금융회사 인수는 말할 나위 없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글로벌화는 불확실성만 키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금융 글로벌화는 우리의 규제 체계, 영업 관행, 기업의 조직구조가 전 세계의 모범규준(best practice)이 될 때 가능하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라 탓하지 말고 국내에서라도 잘해보자. 금융회사들이 잘할 수 있도록 정책당국은 규제의 국제 정합성 제고에 노력해야 한다. 외국 금융회사와 동일한 여건 하에서 경쟁할 수 있는 토대(level playing ground)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 핵심은 인력 체계의 선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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