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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가 쑥ㆍ마늘만 먹은 진짜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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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10면

마늘과 쑥을 좋아하는 웅녀의 자손인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 웅녀는, 웅녀가 되기 전 곰은 어떻게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도 보지 않고 근신할 수 있었을까? 내가 상상한 답은 이렇다. 기대에 부응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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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이 더 이상 못 견디고 21일 만에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자 환웅은 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우직하고 끈기가 있는 짐승이니 100일을 다 채우고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곰아, 나는 믿는다.” 곰은 사람이 되겠다는 욕구보다 순전히 환웅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그 시험을 견뎌냈다는 이야기다. 물론 순전히 나의 억측이다. 이름하여 ‘기대부응본능가설’.

누구보다 내게 그런 본능이 강하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1학년 늦봄이나 초여름쯤이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학교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파란색 물뿌리개를 들고 끙끙대며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 아이가 귀여웠는지 지나가던 교장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 열심히 하는구나. 너 때문에 화단에 꽃들이 더 예쁘게 자라겠다.” 교장선생님이 떠나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교실로 돌아갔지만 나는 화단에 물 뿌리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고 화단이 물바다로 변했어도 말이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만 꽃밭을 썩게 만든다. 기대부응본능은.

배가 터져 죽게도 만든다. “우리 김 서방 식성 하나는 참 좋아. 항상 밥을 안 남기고 한 그릇씩 다 비우거든.” 물론 장모님이야 칭찬할 구석이라곤 눈꺼풀 수술을 하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둘째 사위에게 하는 인사치레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밥을 남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밖에서 이미 저녁으로 과식을 했다 해도 말이다.

반대로 굶어 죽기도 한다. 점심때 앞자리에 앉은 남 부장이 이렇게 말한다. “김 부장처럼 소식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역시 적게 먹는 게 건강에 좋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남 부장 앞에서 밥 한 공기를 다 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날따라 아침도 거르고 출근해서 떨어진 당 때문에 손이 떨릴 정도로 오전 내내 허기가 졌다 해도 말이다.

눈알이 빠지기도 한다. 새로 만드는 홍보책자 시안을 가져와서 교정을 봐달라는 신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한번 봐주시면 안심이 되거든요. 부장님은 정말 오자 찾아내는 데 특별한 소질이 있으신 거 같아요.” 물론 성가신 일과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책임을 함께 나누자는 살뜰한 속셈이 신 팀장에게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렇게 말하는 동료 앞에서 교정 못 보겠다고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전날 과음해서 활자만 보면 속이 더 울렁거린다 해도 말이다. 미식거리는 속을 겨우 달래며 눈알이 빠지도록 교정을 본 내가 드디어 발견한 오자 몇 개를 체크해 넘기자 신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어, 이거 인쇄 들어갔을 텐데. 이 오자들은 이미 제가 수정했어요. 땡큐.”

여기가 이번 칼럼의 끝이다. 원고를 신문사로 보내려는데 중앙SUNDAY 독자의 전화를 받는다. “선생님 칼럼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특히 마지막 부분의 반전이 참 좋던데요.” 인사치레래도 이런 전화를 받았으니 반전 약한 이번 원고를 넘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마감시간을 하루나 넘겼다고 해도 말이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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