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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핑퐁' 시화호 교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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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4년 1월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와 안산시 대부도를 거쳐 화성군으로 연결되는 12.7㎞의 방조제로 탄생했던 시화호.

그러나 완공 7년 만에 농업.공업용수 공급이라는 당초 목적은 백지화되고 바닷물 호수로 남게 됐다.

시화호는 85년 수도권 인구 및 산업체 분산을 목적으로 구상돼 87년 4월 '시화지구 개발사업' 으로 방조제 공사의 첫 삽을 떴다.

여기에는 80년대 후반 중동 등 해외진출 건설업체들이 철수하면서 건설경기가 극도로 침체되자 유휴 건설장비를 활용하고 고용을 확대하려는 전두환(全斗煥)정부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철저한 사전준비 없이 졸속으로 사업이 추진되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환경 기초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물을 가둬 버린 것이 시화호 비극의 시초다.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시화호는 거대한 오.폐수 저장소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산시.시흥시에서 들어오는 생활오수와 안산.반월공단의 산업폐수, 화성군의 축산폐수가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호수 바닥에 쌓였다.

94년 한국수자원공사 조사에서 호수 안 개펄의 중금속 함량은 수은이 자연함유량의 4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아연은 무려 32배, 구리는 17배까지 높았다.

그러자 농업진흥공사는 96년 오염된 시화호 물을 바다로 방류하고 대신 바닷물을 끌어들여 시화호를 정화하겠다고 나섰다.

환경단체는 "오염된 물을 방류할 경우 해양생태계까지 파괴된다" 며 시화호 갑문 앞에서 선상시위를 벌이는 등 크게 반발했다.

정부는 96년 7월 총 4천4백여억원의 예산을 투입, 세 곳의 하수처리장과 호수 주변 배수로 건설 등 수질개선 대책을 추진키로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시화호 수질악화는 계속돼 97년 6월에는 화학적산소요구량(COD)기준으로 26ppm까지 치솟았다. 물고기 떼죽음 사고도 빈발했다.

결국 정부는 환경 기초시설이 완공되기 전에는 시화호 수질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97년부터 시화호의 배수 갑문을 열어 바닷물로 오염을 희석시켜왔다.

그럼에도 정부는 시화호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3년을 끌었다.

시화호를 포기할 경우 그에 따른 비난 여론과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11일 담수화 계획 백지화를 발표하면서도 시화호 방조제 건설비 6천2백20억원이나 수질개선에 들어가는 4천8백96억원에 대해 불필요한 투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방조제를 건설함으로써 앞으로 간척사업에 들어갈 토사의 양이 크게 줄기 때문에 매립 사업비나 토취장 매입에 따른 보상비 등 5조1천9백억원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방조제 건설비를 제외하고도 4조6천억원의 사업비를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화호 주변 개발사업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사업비 절감 얘기는 제 논에 물대기식 해석이다.

게다가 시화호 주변의 하수처리율이 수도권 주민의 상수원인 팔당호 주변보다 높을 정도여서 투자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강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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