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그리스 사태는 ‘태생적 행운’의 한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보름 전 그리스 아테네에 갔을 때 아고라 박물관을 세 번 찾아갔다. 첫날엔 오후 5시쯤 박물관이 있는 언덕을 올라갔다. 먼 발치에서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박물관이라서 주말에 문을 열고 평일에 하루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 비슷한 시간에 다시 갔다. 여전히 문이 잠겨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폐관시간이 오후 3시라고 씌어 있었다. 결국 그 다음 날 오전에야 2500년 전 유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관광안내 책자를 보니 아테네의 다른 박물관들도 오후 3시면 대부분 문을 닫았다. 매년 11월부터 3월까지는 동절기 단축 개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마다 수백만 명의 외국인이 찾아오는 관광도시라는 점에서 믿기 힘든 일이었다.

관공서의 업무 시간은 오후 4시까지였다. 출근 시간은 오전 8시로 한국보다 한 시간 앞서지만 퇴근 시간은 두 시간 빨랐다. 일반 회사의 출퇴근 시간도 비슷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의 1인당 평균 연간 근로시간은 1783시간으로 한국(2261시간)의 80% 수준이다. 그런데도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많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2008년 수치를 보면 한국은 1만9115달러, 그리스는 3만1749달러다. 거칠게 비교하자면 한국보다 일은 20% 적게 하는데 소득은 30% 이상 많은 셈이다.

상대적 풍요의 비결은 문화적 유산과 지리적 위치에 있다. 그리스의 관광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8%가량을 차지한다. 매년 유럽연합(EU)에서 받는 개발지원금도 GDP의 10% 이상이다. 그리스는 1981년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의 열 번째 회원국이 됐다. 다른 회원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컸지만 지중해를 세력권으로 확보하려는 회원국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스는 그 뒤 EU의 지원 등에 힘입어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뤘고, 2001년에는 유로화를 통화로 쓰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이처럼 잘나가던 그리스가 요즘 세계 경제회복의 걸림돌 신세로 전락했다. 과도한 재정적자 때문에 국가부도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가 세금은 열심히 안 거두면서 빚을 내 국민들에게 나눠준 결과라고 한다. 뼈대 있는 집에서 태어나 좋은 동네에서 잘살았는데 헤픈 씀씀이 때문에 신용불량 위기를 맞고 있다는 얘기다.

아테네에 머무르는 동안 그리스 사태는 ‘태생적 행운’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동시에 그런 복을 안고 태어나지 못해 근면·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나라를 일굴 수밖에 없었던 한국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완벽한 행운도, 완벽한 불행도 없다는 어디선가 읽었던 말과 함께.

그리스는 한국전쟁에 약 5000명의 군인을 보냈다. 당시 이 나라 인구가 700만 명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알렉산더 대왕 원정 이후 최대의 파병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는 한국 조선업체의 큰 손님이기도 하다. 지난해 선박 주문 총액이 20억 달러 이상이다. 넉 달 뒤 열리는 월드컵에서 그리스는 한국의 첫 상대다. 그때쯤에는 이 나라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걷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