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션와이드] 예술인·산골주민들 '한 가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지난 7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원리 마을.

정월 대보름을 맞아 이 마을에서도 풍물패가 집집을 도는 지신밟기 행사가 벌어졌다.이날 풍물패에는 원래 주민들뿐 아니라 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얻고 사는 대학교수들도 끼어들어 어깨춤을 추며 흥을 냈다.

동네사람들도 이들 외지출신 이웃의 집을 들러 한바탕 놀아주고 술상을 대접받았다.

“학식이 높고 낮음을 떠나 우리는 오랜 이웃처럼 한 데 어울려 잘 지냅니다”

작년까지 마을 이장을 지냈던 鄭효덕(56)씨의 말이다.

이 마을은 경산∼청도간 국도 인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찾는 사람마다 탐을 내는 산골이다.봄이면 마을 양편의 산비탈에 복사꽃·진달래가 물결을 이루고 가을엔 집집마다 감이 익는다.

1990년대 초 처음 이 곳에 터를 얻은 사람은 민요 명창으로 유명한 박수관(46)씨. 이때부터 국악인들을 비롯,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하나둘씩 찾기 시작했다.

1997년 가을,경북대 국악과의 구윤국(59 ·거문고)교수가 이 곳에 눌러 앉으면서 외지인 ·원주민 간의 동화현상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술을 좋아하고 소탈한 具씨는 주민들과 어울려 흉금을 털어 놓을 정도로 친해졌다.

달 밝은 밤에 막걸리를 나누며 즉석 국악공연이 벌어지는가 하면 주민들은 具씨의 전자오르간 반주에 맞춰 한 곡씩을 뽑기도 했다.具씨를 자주 찾아오는 제자·지인들도 주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오히려 더 좋아했다.

이같은 마을 분위기와 풍광에 이끌려 최근 2∼3년 사이 인근 대학의 교수 두사람이 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강대석(대구가톨릭대 ·철학)교수는 집앞 텃밭을 가꿔 올 겨울 김장도 마련했다.

주민 정용락(62)씨는 “그들이 이곳에 별장을 꾸미고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하려 했다면 이웃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에 터잡은 외지인들의 집은 여느 농가와 다르지 않다.

具씨도 마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보일러를 새로 하고 마당에 대형 화목난로를 놓았을 뿐 뒷곁의 자두나무 ·감나무 등 시골집의 운치를 그대로 살렸다.

날이 풀리는 내달부터는 여류 시인 두사람이 이 마을에 창작실을 마련하는 공사가 시작된다.창작 글방의 이름은 ‘산창한담’(山窓閑談)으로 미리 정해져 있다.

경산=정기환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