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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다지자] 34. 엉터리 번역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무삭제 완역판' 이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두세 곳 출판사에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작 『걸리버여행기』가 나왔다.

나는 그 책의 내용을 원문과 꼼꼼히 대조해 보면서 여러 차례 놀랐다.

원문을 마구 빠뜨린 것은 물론 엉뚱하게 번역한 대목이 너무 많아 거의 파본(破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그릇된 번역관행은 원작을 모독하고 독자를 속임은 물론 출판문화의 기초를 허무는 결과를 빚는다.

원작 중 걸리버 선장의 편지에 '스미드필드 지역에서 법률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불타버릴 때' 라는 부분은 놀랍게도 '스미스필드 지역이 법률서적의 금자탑으로 빛날 때' 로 번역돼 있다.

또 '항해의 상이한 항로와 화물들' 이라는 대목은 어찌된 셈인지 '항해의 변주곡과 방패문장' 으로 번역됐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명치유신 이후 모든 분야에 걸친 외국서적을 국민에게 집중적으로 아주 성실하게 번역, 보급해온 결과다. 일본에서 노벨문학상이 두 번이나 나온 것은 바로 번역문학의 기초 위에서 가능했다.

나는 외교관인 친구로부터 파리에서 제일 큰 서점에 들어가 보고 실망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문학 코너가 별도로 있을 정도로 번역된 일본작품이 많았다고 한다.

반면 우리 문학작품은 기타 코너에, 그것도 맨 밑바닥에 4~5권 정도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하이네만 출판사는 아프리카 작가들의 작품을 3백여 종이나 영어로 출판했다.

그런데 서울의 대형서점에 가보면 더욱 실망한다. 우리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것을 찾아보면 20여권에 불과하다.

한국방문의 해나 2002년 월드컵이 무색하다. 제대로 된 번역물을 많이 내는 게 국제경쟁력의 원천이 아니겠는가.

이동진 <전 대사, 번역문학가.해누리기획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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