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끊고 산으로 간 시인 “삶이 잘 보입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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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씨는 “세상을 잠시 잊는 산행과 달리 나는 산에서 세상을 본다”고 말했다. “속진의 삶이 산에서는 명료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씨의 산행과 거기서 얻어지는 산시는 그만큼 산 아래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김경빈 기자]

‘산의 시인’ 이성부(68)씨가 아홉 번째 시집 『도둑 산길』(책만드는집)을 펴냈다. 비공식적으로 1000만 명을 헤아린다는 등산 애호가들에게 귀가 솔깃한 소식 일 것 같다.

올해 이씨는 등단 50주년이다. 그의 등단 이력은 사람 붐비는 등산로처럼 좀 복잡하다. 1962년 ‘현대문학’, 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각각 등단했다. ‘최초 등단’한 해는 아직 고등학생 신분이던 60년이었다.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다. 알아주는 이 없어 등단 매체를 바꾸다 보니 생긴 일이다. 2005년 여덟 번째 시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출간 후 그에겐 ‘놀라운 손님’이 찾아왔다. 간암이다. 간동맥색전술 시술을 몇 차례 받았다.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새 시집에 이런 변화가 반영돼 있으려니 했다. 빗나갔다. 50주년 운운은 찾아볼 수 없다. 공교롭게 그런 해에 시집을 낼 만큼 시가 쌓였을 뿐이다.

간암도 마찬가지다. 시집은 산시(山詩)로 시작해서 산시로 끝난다고 해도 될 판이다. 당장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 ‘안 가본 산’에서 시인은 산행이 ‘가슴 설레는 공부’라고 고백한다. 너덜겅(돌이 흩어진 비탈)에서 목격한 돌무더기에서는 실현되지 못한, 한편으론 부질없는 ‘욕망들의 단단한 부스러기’를 읽는다(‘너덜겅 내려가며’). 대자연 경물(景物)에 견줘 자아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은, 서정시에서는 어쩌면 심상한 일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산에서 돌아온 후 며칠씩이나 시인에게 산 기운이 지속되는 현상이다. 가령 시인은 ‘산에서는 듣지 못했는데/산에서 돌아온 이튿날 아침이면 어김없이/산 울음소리 내 방에 가득하다’(‘세이·洗耳’)고 노래한다.

이씨를 인터뷰한 24일, 서울은 관측사상 최고 2월 기온을 기록했다. 이씨는 땀 잘 빠지고 젖어도 잘 마르는 기능성 등산복, 암릉 등반에 적당한 릿지화를 신은 차림새였다. 언제든 내키면 두 세 시간 서울 시내 산행을 하기 위한 일상적인 차림이다. 시에 관한 대화는 어느새 산행으로 돌아가 있곤 했다.

대화 중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이씨가 말했다. “나이 들면 산에 다녀야 돼요.”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산으로 돌아가니까!” “땅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요?” “땅이 산이야….” 이씨에게 산은 단순한 시의 배경 공간이 아니다. 사람의 역사·삶·풍속·인문·사상이 밴 터전이다. 그러니 실익 없는 추궁 그만 뒀다.

이씨는 과거 민중적 서정시 계열로 분류됐다. 74년 시집 『우리들의 양식』에 실린 명시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로 시작해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로 끝난다. 봄은 어렵지 않게 ‘민주화’로도 읽힌다. 그는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 간의 조화를 노래해 왔다.

인터뷰 말미 그는 전남 강진 일대 산행 얘기를 꺼냈다. 또 다른 산시가 생겨날 참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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