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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자식농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왜 저축을 하느냐고 물으면 내집 마련을 위해서라는 대답이 늘 1등을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도 끝난 모양이다.

자녀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저축한다는 응답(20.1%)이 처음으로 집 장만을 위해 저축한다는 대답(19.5%)을 앞질렀다는 소식이다.

<본지 2월 1일자 29면> 1973년부터 매년 도시가계의 저축 목적을 조사해 온 주택은행의 앙케트 결과다.

주택 소유에 대한 인식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내집 마련 부담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라고 보면 반가운 현상이다. 하지만 자녀교육비 때문에 저축을 해야 하는 건 우리의 또다른 서글픈 현실이다.

자녀교육비라는 게 뭔가. 학교등록금도 있겠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이 아이들 학원 보내고 과외시키는 데 드는 사교육비 아니겠는가.

지난 99년 당시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생의 연간 과외비는 6조7천7백억원으로 교육부 총예산의 35%에 달한 것으로 돼 있다.

가구당 평균 1백92만원을 지출한 꼴이다. 부업전선에 나선 가정주부의 43%가 자녀 과외비 때문이라는 조사도 있다.

오죽하면 '자식농사' 를 그 해 투입한 돈과 학교에서 받은 점수를 비교해 결산하는 인터넷 사이트(www.dstory.net)까지 생겼을까.

그렇다 보니 요즘에는 자식농사를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로 떠나는 '맹모형(孟母型)이민' 이 늘고 있다지만 거기서도 부모 노릇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근호는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명의 학부모가 자녀들을 학교에서 축구장으로, 피아노 교습소로 태워다 주고 숙제를 돌봐주느라 매일 정신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면서 미국에서의 자식농사를 '결승점이 보이지 않는 철인 3종경기' 에 비유했다.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한 '매니저' 로 부모 역할이 전락했다는 것이다.

일류대학 진학 여부가 자식농사의 성패로 인식되는 답답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부업을 해서라도 자식 과외를 시키려는 부모를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들인 돈만큼 성적이 반드시 따라주는 게 아니니 문제다. 몇 해 전 대입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한 여학생은 "밤 늦도록 책을 읽는 아빠 곁에서 함께 공부했을 뿐" 이라고 말해 '충격' 을 준 일이 있다.

모범을 보이면서 자식이 힘들어 할 때 웃으며 격려해 주는 것 이상의 자식농사 비결이 있을까. 잘못된 농사는 내년을 기약할 수 있지만 한번 잘못 지은 자식농사는 평생을 간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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