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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천지개벽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독일 통일 직후 필자는 한 동료교수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내기를 한 적이 있다.

독일이 갑작스레 통일된 것처럼 한반도에도 곧 통일이 닥칠 것이란 그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 완전한 개혁.개방 힘들어

그때 그 교수는 그가 참여하고 있던 대통령 자문위원회에서 북방정책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당시의 대통령이 나름대로의 정보에 근거해 내린 북한의 체제붕괴 예측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예측은 빗나갔다.

남북관계의 개선에 크게 기여하길 바라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최근 북한의 조속한 변화에 대해 자신있게 예측했다.

북한이 올해 초에 개방과 개혁의 길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이 신년 초에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성공작으로 판단하고 북한에도 신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사실만으로도 북한의 변화의 가능성을 크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북한의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중국과 같이 개혁.개방을 통해 인민들의 후생을 증진시키든지, 아니면 폐쇄와 억압으로 소위 '우리 식' 생활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력으로는 도저히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빈곤 함정에 빠져 있는 북한이 외국의 자본과 기술 도입을 위해 개방과 개혁을 시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지금껏 개방과 개혁을 늦춰온 것은 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인민의 경제적 후생보다 그들의 체제유지가 우선시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우선 경제에만 개혁과 개방을 시도한 중국모형을 북한이 검토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金위원장이 상하이(上海)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북한에서도 일순간에 천지개벽을 추진하리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상하이와 푸둥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에는 이미 20년 이상의 개방과 개혁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며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모습보다는 더 큰 보이지 않는 제도와 이념적 변혁을 겪어왔음을 金위원장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결코 중국과 같이 자신감있게 변혁을 도모할 위치에 서있지 않다.

그러기에 북한이 중국모형을 본뜰 가능성은 크나 결코 중국과 같은 대담하고 실질적인 개혁과 개방을 시도하지는 못하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마도 개성과 신의주.원산과 같은 지역을 부분적으로 개방해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자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이번에 선진국의 금융과 자본이 진출해 있는 푸둥을 방문하는 것보다 중국의 풍부한 노동력으로 외화벌이를 시작해 개방정책의 첫 성공케이스를 보여준 선전을 방문하는 것이 오히려 유익했을 것이다.

金대통령의 주문대로 우리는 북한의 변화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물량적 지원보다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할 것이다.

중국의 성공이 단순히 몇개의 경제자유지역을 설치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려줘야 한다.

눈에 보이는 높은 빌딩이나 외국회사들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이해와 제도의 변화가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 우리측 대응은 차분하게

냉혹한 국제시장의 질서를 바로 소개하고 국제기구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나서서 북한의 변화를 꾀하려는 욕심은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욕심이 클수록 북한은 그들의 변화를 마치 큰 개혁을 단행해 우리에게 큰 혜택을 주는 것처럼 선전할 것이며,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에서 평화의 대가를 크게 요구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란 예측이 빗나간 것과 달리 북한이 곧 개혁.개방으로 나올 것이라는 金대통령의 예측은 그대로 실현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비는 흥분과 과잉반응이 아니라 냉정히, 그리고 실질적으로 상호 이득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李榮善(연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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