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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이 매력이다, 현대음악 찾기 외고집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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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피아노 음향은 설형문자와 같이 자극적인 기호와 흔적을 남긴다. 증가하는 쐐기가 점점 음악을 발생시킨다.’

현대음악 앙상블 ‘소리’의 2001년 창단 연주회 중 곡목 해설에 쓰였던 문장이다. 독일 작곡가 볼프강 림(58)의 ‘피아노와 7명의 연주자를 위한 암호 I’을 공연한 무대였다.

그 다음 설명도 만만치 않은 난문(難文)이다. ‘멜로디와 코드는 점차 관악기와 피아노로 분산되며 2:3:5:6:7의 복합 리듬으로 나눠진다.’ 복잡한 음악을 쓰기로 유명한 미국의 콜론 낸캐로(1912~91)의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Nr.2’에 대한 설명이다.

손님을 쫓아버리기에 딱 좋은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두 곡 모두 한국에서 연주된 적이 없는 생소한 작품. 당시 독일에서 작곡·지휘 공부를 끝내고 귀국했던 박창원(43)씨는 ‘소리’를 창단해 1980년대에 쓰인 이 두 곡을 연주했다.

“1883년 생인 안톤 폰 베베른의 곡만 연주해도 상당히 최첨단으로 여기던 때였어요. 림과 낸캐로를 초연했을 때 작곡가들은 흥미로워했지만 일반 청중은 꽤 썰렁한 반응이었죠.”

하지만 박씨와 ‘소리’는 10년째 현대음악을 고집하고 있다. 창단 연주 때보다 더 어렵고 실험적인 작품도 피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한국 초연한 외국 작품만 20여 곡. 한국 작곡가의 작품까지 하면 80곡이 넘는다.

현대음악은 어렵다? 현대음악 앙상블 ‘소리’와 리더 박창원(맨 앞)씨는 청중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최신 음악을 찾아 세계 음악계를 샅샅이 뒤진다. [‘소리’ 제공]

◆현대음악 한국대표=‘소리’의 외롭던 작업이 서서히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한국을 넘어 외국에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스페인 타라고나의 메트로폴 극장이 이달 말 여는 현대음악 축제에 초청된 것. ‘소리’는 스페인 3개 도시에서 세계 각국의 현대 음악 연주단체와 한 무대에 선다. 10년 만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이다.

창단 초기에는 이름 짓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현대음악 앙상블’이라고 이름 붙이면 더 이상 모차르트·베토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옛날 음악’을 해야 청중이 많이 들고, 단원들도 연주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반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체성’을 포기할 순 없었다. 생존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저작권료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현대음악만 하는 앙상블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년간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국내 청중이 현대 음악에도 점점 익숙해지는 것을 실감했다. 소위 ‘동종 업계’의 작곡가로 주로 채워지던 객석에 일반 청중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2005년 독일 작곡가 마르쿠스 헤시틀레(43)를 소개하자 그의 다른 작품도 들어볼 방법을 묻는 e-메일이 쏟아졌어요. 현대 음악 팬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고, 이 일에 확신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음악의 직업화를 꿈꾸며=현재 ‘소리’의 단원 14명 중 현대음악만 하는 전문 음악가는 4~5명 정도다. 다른 단원들은 독주회나 여타 앙상블 연주에서 ‘옛 음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박씨의 꿈은 이 숫자를 멤버 전체와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청중을 끌 수 있는 현대음악을 찾는 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많아져야 해요.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죠. 사실 연주 준비 기간보다 해당 곡을 찾는 데 시간이 더 많이 들거든요.”

‘소리’는 스페인 연주를 마치고 다음달 초 귀국, 9일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한국 작곡가 윤승현(44)의 신작을 선보인다. 청중은 새로운 음악을 만나는 시간이고, 작곡가에게는 최신 작품을 ‘소비’시킬 수 있는 기회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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