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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환자 마음의 상처 치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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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국 5개 백병원을 총괄하는 백중앙의료원장이자 일산백병원장인 의학박사 이원로(72·사진)씨에게는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는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시를 쓰고 시집을 내어 지인들은 물론 병원 동료와 환자들에게 “읽어보시라”며 권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조지타운의대 심장내과 교수로 일하던 1989년 문예지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그 뒤 2~3년마다 한 권씩 시집을 내왔다.

최근 이 원장은 여덟 번째 시집 『바람의 지도』 (한국문연)를 펴냈다. 최근작 70여 편을 묶었다. 그는 사실 대형 병원의 행정책임자로, 현역 의사로 바쁘게 살고 있다. 시는 언제 쓰는 것일까. 22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백병원 원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 원장은 “특별한 일 없으면 주말은 거의 시를 쓰며 보낸다”고 했다. 남들이 그린에 나가 골프 치는 시간에 자신은 집이나 병원장실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다. 주중에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그때그때 메모해 둔다. 학회 참석차 외국 나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쓴다. 술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또 “환자의 투병 과정, 가족들의 애환 등을 지켜보다 보면 결국 보편적 주제로 연결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 신과의 관계’ 같은 것들이다. “생명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죽음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시를 통해 그런 문제에 접근해 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허만하·마종기·김춘추 등 국내 시단에서 의사 시인의 존재, 그들의 독특한 어법은 낯설지 않다. 삶과 죽음의 위태로운 경계를 빈번하게 목격하는 직업 특성상 시 작업에 나서는 사정은 이 원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이번 시집에서 긴박한 장면들은 보다 차분하게 걸러진 모습이다.

“모든 게 흐른다/시작은 끝으로/끝은 다시 시작으로/거품이 일어난다/거품이 꺼진다/이 또한 흐름이다/흐름 속에 흐름이 있고/흐름이 흐름을 낳는다.” ‘예정’이라는 시의 첫째 연이다. 삶과 죽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순환론적 세계관이 소박하고 알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 원장은 의술과 예술의 교집합을 강조했다. 몸의 병을 고치는 의술처럼 예술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기암처럼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 환자에게 현대 의술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치료하고, 돌봐주고, 위로하는 세 가지 기능 중 결국 위로입니다.”

요즘 시집 초판은 대개 2000부를 찍는다. 그러나 이 원장은 이번 시집을 5000부 찍었다. 주변에 나눠주기 위해서다. ‘이원로표’ 위안의 한 조각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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