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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적군파 출신 마이어비트 30년 여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1970년대 전 유럽을 테러 공포에 몰아넣었던 독일 적군파는 3년 전 사회주의 혁명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 극좌파 운동으로 입은 역사의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5일 나치 군인의 딸로 태어나 요인 납치.암살과 은행 강도에 가담한 열렬 적군파 대원에서 폭력의 상처를 치유하는 코소보 난민촌의 평화 전도사로 변신한 한 독일 여성의 30년 인생역정을 소개했다.

이 여성은 '불과 한 세대 전 열병처럼 번졌던 '좌파폭력 혁명의 이데올로기는 가해자들에게도 견뎌내기 힘든 세월을 안겨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50세로 흰머리가 가득한 질케 마이어비트.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나치에 충성했던 것을 치욕으로 느껴왔던 그녀는 69년 함부르크대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당시 프랑스.독일.일본.미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특히 독일에서는 나치 잔재 청산운동이 한창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했던 마이어비트는 처음엔 아이들을 어른들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키자는 취지로 만든 유치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핵심 운동세력에 가담해 73년부터는 집단생활을 하며 테러요원 훈련을 받았다.

적군파에서 그녀가 맡았던 임무는 테러 대상의 정보를 입수하는 정탐활동. 77년 적군파들이 투옥된 동료를 석방하라며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해 벌인 인질극에 핵심 요원으로 가담했고 같은해 한스에버하르트 슐라이어 독일경영자총연합회 회장을 납치.살해하는 데도 참가했었다.

그녀는 늘 45구경 권총을 지니고 다니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지명 수배자가 됐고 동독 비밀경찰의 도움으로 10년 동안 도망자 생활을 했다. 이름은 두번이 바뀌었고 성형수술도 했다.

독일 통일 직후인 90년 결국 경찰에 붙잡혀 5년 동안 복역한 뒤 95년 특별사면됐다.

도주생활을 하면서부터 사회주의 혁명에 회의를 품었던 그녀는 다시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하고 사회로 나왔다.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청소년들을 교화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화려한 전력' 을 가진 그녀가 아이들을 상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방황하던' 그녀는 지난해 유고 내전에서 인종청소를 당하는 아픔을 겪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있는 코소보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에게 재봉기술을 가르치며 전쟁의 상처를 씻겨주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브레조비체 난민촌에서 그녀는 폭력의 공포에 떨고있는 주민들에게 "당신이 세상을 바꾸는 희망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상언 기자

<독일 적군파는…>

1970년 생겨난 독일 적군파(RAF)는 1988년 공식 해체될 때까지 독일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테러 조직이다.

독일 학생운동의 핵심이었던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가 결성한 '바더마인호프 그룹' 이 전신으로 마오쩌둥(毛澤東)주의에 따른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목표였다.

'나치 잔재 척결' '베트남전 반대' '반제국주의 전쟁' 등을 기치로 내걸고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말까지 요인 납치 및 암살, 독일내 미군기지 폭파 등 수백건의 테러를 자행했다.

77년 11월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과 연계해 승객 91명을 태우고 소말리아로 가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공중납치해 적군파 요원 11명의 석방을 요구하다 기장을 살해하기도 했다.

80년대 말부터 무장테러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진데다 독일 정부가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했으며 92년 4월 무장투쟁 포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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