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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 선수, 마술사, 소믈리에…“튀어야 판다” 제약 영업맨들의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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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코리아의 ‘마술사’ 이재규 과장. [각사 제공]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코리아 백신사업부의 이재규(36) 과장은 ‘제약업계의 마술사’로 통한다. 병원이나 세미나 장소에서 무료로 마술 공연을 하거나 강연을 열어 마술을 가르친다. 주경야독으로 마술 실력을 갈고닦았다는 그는 “업무에 시달리는 의사들과 병마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주고 싶어 마술을 배웠다”고 했다.

병원장과 의료진이 이 과장에게 부탁해 열린 마술쇼도 잦다. 이 과장은 이런 노력 덕분인지 지난해 GSK 내에서 상위 5%에 드는 영업실적을 이뤘다.

제약 영업의 오랜 악습이던 리베이트 관행에 제동이 걸리면서 영업현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8월 이후 제약협회가 나서 리베이트 고발제도를 운용하는가 하면 병·의원에 공문을 보내 리베이트 근절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운동을 벌인 것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영업현장의 최전방에서 뛰고 있는 영업사원들의 변화를 자연스레 재촉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16일 확정 발표한 ‘의약품 거래 및 약가제도 투명화 방안’에서도 리베이트를 받는 의사들까지 처벌하는 쌍벌 규정이 명시되면서 이런 변화는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아이스하키로 의사들과 소통하는 중외신약 김상훈씨. [중외신약 제공]

중외신약에서 항진균제 영업을 하는 김상훈(29)씨에게 서울 태릉 아이스링크는 또 다른 사무실이다. 1주일에 세 차례 오후 10시에 게임이 시작되는 아이스하키 인터넷 동호회 ‘파드레스’ 회원인 김씨는 지난해 6월 거래처인 경기도 부천 연세드림비뇨기과 하헌구 원장의 권유로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대부분 장비는 중고로 구입하고 일부는 회원들한테서 얻었다. 시작할 때 이것저것 갖추는 데 70만원 정도 들었다. 경력은 일천하지만 통산 6골을 기록해 주변에서 “전도양양한 공격수”라는 칭송을 듣는다.

“처음엔 고객과 친밀해져야겠다는 개인적인 목표, 과거와 다른 영업방식을 구사해야 한다는 회사 방침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이스하키를 통해 자연스레 제품과 일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게 됐어요.”

김씨는 아이스링크를 자신만의 새로운 영업현장으로 활용하는 셈이다. 이 얘기를 듣던 하 원장은 “요즘은 병원에서보다 동호회에서 더 자주 얼굴을 본다”며 웃었다. 실제 이들은 자정 무렵 시합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병원에서 못다한 얘기를 스스럼없이 나눴다. 하 원장은 “솔직히 진료 시간에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영업사원들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기 쉽지 않다. 이런 비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도 “공정경쟁이 정착되는 제약시장에서 나만의 차별화된 영업방식으로 목표를 달성해 나가겠다. 제약업계에 투명영업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와인아카데미를 운영하는 한국노바티스 이연호 차장. [각사 제공]

한국노바티스에서 대전지역 병·의원을 담당하는 이연호(35) 차장은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다. 영업사원으로서 큰 어려움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객인 의사들에게 다가설 때 술을 적극 활용한다. 와인에 관심이 많은 개인 병원장들을 상대로 ‘와인아카데미’를 적극 이용한다. 처음에는 전문강사를 불러 강의를 들려주다가 요즘에는 자신이 직접 소믈리에가 돼 와인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와인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의사들이 이 차장을 찾는 경우가 늘었다.

이 차장은 “심혈관계 질환 제품을 담당하는 영업사원으로서 심장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와인 관련 소믈리에 역할이 제격 같다”고 말했다. 2006년 한국노바티스에 입사한 이래 우수 영업사원들만 받는 상을 연거푸 수상했는데, 이는 이 회사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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