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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가는 기분"… 달라진 입영풍속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9일 오전 5시 부산역.

노랑머리.파란머리를 한 젊은이 2백여 명이 대합실로 속속 모여들었다. 카메라에 여행용 가방을 든 차림새가 마치 캠핑이나 가족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신사년 첫 입영열차를 탈 입대 장정과 친구.가족들이다.

오전 5시30분 개표가 시작되면서 여기저기서 이별의 포옹을 나누는 장면들이 연출됐지만 눈물을 보이는 젊은이는 없었다.

5시40분 드디어 102보충대로 향하는 춘천행 3316 무궁화호(7량)열차가 출발했다.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 대부분 웃는 얼굴들이다. 일부 어머니들이 눈물을 훔칠 뿐 진한 슬픔을 자아내는 가수 김민우의 노래(입영열차 안에서)는 어느 구석에서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객차안에는 환송나온 친구.가족의 절반 가량이 장정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케이크를 꺼내 조촐한 생일파티를 여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여기저기서 휴대폰 전화가 온다.

한 장정은 "경주에 있는 여자친구가 전화를 했다" 며 기뻐했다.

온통 눈물바다를 이뤘던 지난날 입영환송 장면과는 딴판이다. 입영열차를 타는 순간부터 '나라의 몸' 이 되어 호송병들의 눈빛만 봐도 주눅이 들었던 선배들은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날 입영열차에 오른 이명희(李明姬.21.여)씨는 시계를 꺼내 남자친구 박중화(朴重華.21.부산시 금정구 구서동)씨에게 채워준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 얼른 다시 만나게… . "

"소풍가는 기분으로 갔다 올게. " (朴씨)

옆자리의 송준용(宋晙溶.20.부산시 북구 만덕3동)씨는 자신의 사진 7장을 꽂은 앨범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수원역에서 탈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이다.

宋씨는 "내가 없는 시간에도 여자친구가 좋은 추억을 만들어 앨범을 완성한 뒤 함께 보고 싶다" 며 "멋있는 남자가 돼 돌아와 힘껏 안아주겠다" 고 말했다.

다른 자리에서는 한 장정이 "입대하면 여자친구 절반은 떠난다" 는 비관적인 견해를 편다.

그러자 환송온 친구들은 "선배들의 경우를 보면 70%는 남아있다" 며 믿음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부대까지 따라가는 입영환송을 필수과목으로 삼는 친구들도 많다.

유병기(劉炳麒.20.연세대 화공생명공학2)씨는 논산훈련소 6회, 의정부 306보충대 3회를 간 경력을 가지고 있다.

춘천 102보충대는 이번이 처음이다. 논산에는 단골 국밥집이 생겼을 정도로 이력이 났다.

열차가 오전 6시45분 동대구역에 도착, 1백50여 명의 장정과 친구.가족들이 타자 차 안은 곧 식당으로 변했다. 김밥.초밥.과자.과일 등을 먹으며 기차여행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부모들은 대개 입대하는 아들이 친구들끼리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사고나 내지 않을까봐 함께 차를 탔다고 했다.

김춘호(金春浩.54.부산시 사하구 장림동)씨는 "보충대에 제시간에 도착시키려고 함께 간다" 며 "두달 전 아들 친구 한명이 기차를 놓쳐 서울에서 춘천까지 택시를 타고 입영한 적이 있었다" 고 전했다.

기차는 경부선을 지난 경춘선으로 들어서자 함박눈이 쏟아졌다. 설원으로 기차여행을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후 1시21분 드디어 열차가 춘천역에 도착, 버스로 집결지인 102보충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 군가가 울려퍼졌다. 비로소 군대 냄새가 났다.

비로소 젊은이들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정예육군' 의 위병소를 들어선다. 휴대폰은 이 때까지도 쉴새 없이 울려퍼졌다. 휴대폰은 사복과 함께 집으로 부쳐진다.

연병장에 들어 선 입대 장정 윤상필(尹相弼.20.경북 안동시 신세동)씨는 "담담하다" 며 "요즘 우리 친구들은 어렵고 힘들어도 밝은 표정을 짓는다" 고 말했다.

그러나 장정들을 들여 보내고 보충대 정문을 나서는 연인과 어머니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쨌든 이별은 참기 어려운 아픔인가보다.

3316호 무궁화호 열차〓정용백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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